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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란스(Amaranth)52호/가대人 2010. 2. 26. 01:07
김민경 인문학부 09
I.Amaranth
어릴 적 나는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의 거대한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할아버지의 취미는 희귀서적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 도서관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책들이 먼지를 품은 채 잠들어있었다. 할아버지는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고 도서관은 내 차지가 되곤 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까지 책이 있었기 때문에 사다리를 타고 위험한 모험을 감수해야할 때도 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모험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일이었다.
어느 날 나는 큰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제일 안쪽 서가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그곳은 어두컴컴하고 왠지 모를 비밀스런 공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유독 신화나 민담을 다룬 책을 즐겨 읽었던 나는 그곳에 커다란 괴물이 있다고 제멋대로 상상해버리고는 가기를 꺼려했었다. 그곳은 어둡고 축축하며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의외로 아늑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양쪽에 빽빽이 자리를 잡고 있는 책들은 내가 오자 희미한 유혹의 속삭임을 건네었다. 그중에서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책이 있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데다가 다리 여덟 개 달린 녀석에게 집까지 내주고 있었지만 양쪽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금테두리만큼은 오랜 세월 앞에서도 변치 않은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내자 책에서 떨어진 거미가 당황한 듯 제자리를 빙빙 돌다가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책은 어두운 녹색표지에 금박글씨로 '세계 희귀식물 대백과사전'이라고 적혀있었다. 웬만한 어른들도 들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두꺼운 책이었다.
밝은 곳으로 책을 가지고 나온 나는 아무데나 펼쳐보았다. 식물의 사진대신 동판화가 나왔고 옆에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학술명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학 명 Amaranthus
분 류 비름과
서식지 불명
그 꽃잎을 달여서 마시면 영원불멸을 얻는다는 전설상의 꽃이었으나 최근 Diallo교수의 학술서에서 그 존재가 언급되면서 존재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말 그런 식물이 있는 것일까? 그 백과사전에서 단지 전설상의 꽃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다면 나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 꽃의 존재여부에 대한 모호한 끝맺음은 나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 주었다. 나는 그 꽃 그림을 찢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저택 뒤뜰의 식물들과 비교해보곤 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된 뒤뜰에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고 가끔씩 야생동물의 쉼터가 되곤 했다. 해가 저물 때까지 그곳에서 놀고 나서 온통 풀과 흙투성이가 된 채 집에 돌아가면 항상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곤 했다. 비오는 날이면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할아버지는 여러 가지 전설들을 아주 실감나게 이야기하셨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 머릿속에 이야기속의 풍경들이 활동사진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때만큼은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할아버지와 나만의 시계가 움직였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여느 때와 같이 할아버지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종이를 무심결에 꺼내보았다. 며칠 동안 잊고 있었던 꽃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왠지 할아버지는 이 꽃에 대해 알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식물학자이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이 꽃을 본적이 있으세요?"
시력이 나쁘신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갖다달라고 한 뒤 안경을 쓰시곤 그 그림을 자세히 살펴 보셨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의아함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어갔다.
"애야, 도대체 이 그림은 어디서 찾은 게냐?"
몹시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물었다.
"할아버지 서재에 있던 커다란 식물백과사전에서 찾았어요."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흠... 이 꽃을 본지도 꽤 오래되었구나. 내 평생에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림으로 다시 보게 되다니..."
할아버지는 먼 추억을 회상하듯 눈을 감으셨다.
"할아버지, 그럼 이 꽃은 정말 존재했던 거군요. 전 커서 꼭 이 꽃을 찾아내고 말거에요. 할아버지 방 창가에 꽂아놓으면 매일매일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애야, 그런 허황된 꿈을 좇지 말거라. 나는 이 꽃을 찾느라고 내 반평생을 소비했단다. 결국 나는 꽃을 찾아냈지. 하지만 내가 알게 된 것은..."
모호한 어투로 말을 끝맺은 할아버지는 조금 슬퍼보였다. 철없는 나조차 더 캐묻지 못할 정도로... 다음날 할아버지는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부모님이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된 나는 할아버지가 주무시다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여전히 나는 아마란스에 대한 환상을 지울 수 없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꽃...
II. Forest
"부우~부우~"
갑자기 들려온 부엉이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숲에서 헤맨지도 벌써 사흘째... '요정의 눈물'이란 이름을 가진 이 숲은 가끔씩 요정이 나타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신비에 싸인 숲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식물이 자생한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어릴 적의 추억을 잊지 못한 나는 식물학자가 되어 세계 각지의 숲을 탐사하러 다녔다. 식물채집이란 명목으로 가긴 했지만 목적은 오로지 '아마란스'를 찾는 것이었다. 그 무렵 우연히 존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탐험가'라 소개한 존은 내가 쓴 논문('아마란스는 실재하는가')을 매우 흥미 있게 읽었다며 아마란스를 찾는데 동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존과 나는 북쪽 끝에 있는 '요정의 눈물'이란 숲에 오게 된 것이다.
“선생님, 오늘은 이쯤하고 텐트를 치시죠.” 존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지.”
나는 코트 깃을 여미며 말했다. 한겨울의 숲은 잔혹할 정도로 추웠다. 나무들의 싸늘한 입김에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다. 적당한 장소에 모닥불을 피운 우리는 꼬치에 끼운 양고기가 익길 기다리며 말없이 마주 앉아있었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을 보니 인생도 저 장작개비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벌써 인생의 무게를 느낄 나이가 된 것이다. 이렇게 쌀쌀한 밤. 모닥불을 두고 앉아 있다 보면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감상에 젖기 마련이다.
"존, 자네 '라샨'이라는 고대의 왕국을 아는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아마란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죠?"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라샨'이라는 왕국이 있었다. 현명한 왕을 둔 덕에 그 나라 백성들은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 세월이 지나 왕은 노쇠해져서 왕위를 물려 줘야할때가 왔어. 하지만 '권력'이라는 이름의 욕망은 왕의 내부를 조금씩 갉아먹어 결국 왕을 탐욕스럽게 만들었어. 왕은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싫었지. 인간의 짧은 생애가 한탄스러울 뿐이었어. 그러던중 '아마란스'의 존재를 알게 되지. 그 다음부턴 짐작이 가지? 왕은 신하들을 시켜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아마란스를 찾아오도록 했어. 하지만 결국 신하들은 아마란스를 찾지 못한 채 왕국에 돌아왔고 돌아왔을 땐 왕이 반대파들에게 암살당한 뒤였어.”
젊은 녀석한테 너무 무거운 얘기를 꺼낸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에 옆을 바라보니 존의 눈꺼풀은 이미 반쯤 감겨있었다. 모닥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사그라 들고 그렇게 숲의 밤은 깊어갔다.
살며시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햇살의 따스한 손길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넘어있었다. 옆을 보니 존은 여전히 코를 골며 곤히 잠들어있었다. 깨우기가 안쓰러워서 혼자 숲속을 산책해보기로 했다. 정직하게 뻗어있는 나무들 사이로 언뜻 언뜻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걷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경사진 곳을 올라가다보니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물소리를 따라 조금 더 다가가자 살얼음으로 덮여있는 시냇물이 나왔다. 한겨울이라지만 아직도 '졸졸'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는 시냇물의 생명력이 대견스러웠다. 세수도 할 겸 냇가에 쪼그려 앉아 손을 씻고 있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 요정이 아닐까?'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나무들 사이로 보일락 말락하는 그것을 좀 더 잘 보기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이 내 시야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그때 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존의 목소리 때문에 그것이 도망 갈 까봐 전전긍긍해했다.
"쉬잇! 존 목소리를 낮춰!"
"네? 왜 그러시는데요. 요정이라도 보셨습니까?"
"응? 아, 아니 아까 저기에 웬 사슴이 서 있더라구.잡아서 스튜라도 만들까 생각 중이었지"
마흔도 넘은 어른이 요정(일지도 모르는 것)을 봤다는 말을 하기가 뭐해서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선생님도, 참. 사냥이 가고 싶으시면 진작 말씀하시지. 사냥용총도 안 들고 사냥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막무가내로 달려들어서 사슴과 씨름이라도 하실 작정이었습니까?"
"하하. 뭐 그럴 생각도 있었지. 어쨌든 내려 가세나. 콩 수프로 아침을 시작 하는 것 도 나쁘지 않겠지."
어쩌면 아까 내가 본 것은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숲이 나에게 보여준 환상.
도대체 숲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숲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꿈속을 걷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숲이었다.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다시 탐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존은 여러 날을 탐색해도 꽃을 찾지 못하자 벌써 반쯤 포기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왠지 모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결과가 눈에 빨리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하기 마련이다. 과정도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
"존,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게. 난 이 숲 어딘가에 분명히 아마란스가 있다고 믿어. 마치 우리와 아마란스가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는 느낌이 든 달까? 그렇다면 애써 우리가 찾지 않아도 아마란스는 언젠가는 우리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낼 걸세."
오후 6시쯤이 되자 주위가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 아마란스는 찾지 못했지만 이미 멸종되었다는 희귀한 식물을 채집하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존을 따라 텐트를 쳐 놓은 곳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자꾸만 뒷덜미에 무언가의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은 적대적이기보다는 마치 나에게 호소하는 듯한 간절함으로 다가왔다. 왠지 그 느낌을 져버릴 수가 없어서 부딪쳐보기로 했다. 존을 먼저 텐트로 보낸 나는 마음속의 부름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나는 갑자기 불어온 시린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주위를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나무, 나무, 나무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감옥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등에 소름이 돋았다. 만월(滿月)의 밤에 늑대라...
지금시간은 밤, 짐승들의 시간이고 나는 그들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된 먹잇감에 불과했다. 어제 어쩐다... 그렇지만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위대한 신이 있어 나를 보호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마치 성지를 향해 가는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달빛에 의지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짐승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무들조차도 숨을 죽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길도 험해졌다. 아니, 더 이상 길이라고조차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험해졌다. 한참을 헤매던 나는 꿈 속인지 현실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III. Truth
끝없이 펼쳐진 붉은 바다... 온 세상이 아마란스 천지였다. 십년이 넘게 아마란스를 연구해온 나는 꽃잎 하나하나의 생김새까지 알고 있었다. 분명 아마란스였다. 지금 내 눈앞에 아마란스가 고고하게 피어있었다. 아마란스는 피보다도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색은 생명의 상징이자 죽음의 상징...
'붉은색'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고 있는 아마란스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불멸의 꽃' 다웠다.
저 멀리 할아버지가 흔들의자에 앉아계셨다. 언제나처럼 무릎위엔 오래된 듯한 책이 있었고 돋보기 안경을 쓰고 계셨다. 할아버지에게 달려간 나는 그의 발치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내 머리위에 손을 얹으시며 미소 지었다.
순간 붉은 꽃잎들이 일제히 흩날리기 시작했고 흔들의자에는 책과 돋보기 안경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으음.. 할아버지 할아버지!"
귀에서 계속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들었다. 한밤중이었다. 방을 둘러보니 탁자 한 개와 옷장 그리고 침대뿐이었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철저히 배제된 듯한 검소한 인상을 주는 방이었다. 창밖에는 교교한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었다. 나가야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의 사나이였다. 두 눈은 짙은 회색으로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연한 금빛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귀밑으로 살짝 내려와 있었다. 요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아한 외모였다. 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목이 쉰 듯 텁텁한 목소리가 나왔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제가 왜 여기 있죠?”
하지만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남자의 회색눈동자는 진실을 담은 채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방안을 둘러보던 나는 탁자위에 놓여진 아마란스 한 송이를 발견했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가만히 다가가서 그것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차가운 줄기의 감촉이 느껴졌다.‘이것은 분명 아마란스가 맞아.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아마란스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새삼 뒤늦은 감동이 밀려왔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간 곳은 거대한 광장이었다. 곳곳에는 전설에 나올법한 요정, 엘프 등을 조각해놓은 석상들이 있었는데 그 정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석상들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광장 여기저기에 세워져있는 건물들은 마치 신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 웅장하고 단아한 멋이 있었다. 신들이 산다는 올림푸스가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광장 곳곳에 서있거나 앉아있던 사람들은 신기함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하나같이 표정이 없는 얼굴들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져 보는 이까지 우울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이 분은 제임스씨 이후로 우리 마을에 온 두 번째 손님입니다. 이분 또한 '아마란스'와의 인연이 깊은 듯 하니 이야기를 들어보는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동의의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놀란 것은 남자의 입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고 '아마란스'를 언급했다는 것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지만 일단 내 얘기를 들려주지 않으면 이 사람들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내 어릴 적 얘기부터 시작해 아마란스를 연구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청중은 매우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자, 이제 제 이야기를 들려드렸으니 저의 질문에도 대답해주십시오. 도대체 당신의 입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이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곳은 또 어디입니까? "
"휴, 드디어 저희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왔군요. 당신은 '라샨 왕국의 전설'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예, 왕의 명령을 받아 아마란스를 찾으러 떠난 충신들의 이야기는 유명하죠."
"하지만 그 전설 속에는 숨겨진 일화가 있습니다. 결국 그 신하들은 북쪽 숲에서 아마란스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아마란스를 갖고 왕국에 돌아오던 중 흑사병을 만나게 됩니다. 수십 명의 신하들이 치료 한번 받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남은 신하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죽음의 병에 걸린 뒤였습니다. 결국 벼랑 끝에 몰려버린 신하들은 아마란스를 먹고 맙니다. 눈 앞의 죽음이 두려워 영생을 택한 것입니다. 흑사병은 거짓말처럼 나았고 남은 신하들은 무사히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죽은 뒤였고 신하들은 비통에 잠깁니다. '아마란스'의 전설은 세월의 흐름에 묻혀갔고 불로불사의 삶을 택한 신하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저주'였습니다. 불로불사의 몸을 가지게 된 신하들은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그들을 기억해주는 이가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들의 심장은 고동을 멈춘 채 싸늘하게 식어갔습니다. 한때는 엄청난 돈을 모아 세상의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려보기도 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마란스'를 찾은 북쪽 숲으로 떠났습니다. 자신들을 이해해줄 이는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들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었고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살아왔던 것입니다."
남자는 거기까지 이야기 한 다음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외부사람이 길을 잘못 들었는지 그들의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외부인 또한 '아마란스'를 연구하는 학자였습니다. 자신을 '제임스'라 소개한 그분은 '불로불사'의 몸을 가지게 된 이들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함께 슬퍼해주었습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제임스의 모습에 신하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임스는 마을을 나가는 순간까지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었습니다.”
희미했던 것이 색채를 띠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제서야 왜 그들이 슬퍼보였는지 이해가 갔다. 갑자기 목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하고 솟아올랐다.
“그러면, 당신들은...”
“예, 저희가 그 신하들입니다. 지금은 목자를 잃은 양떼에 불과하지만...”
남자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말했다.
“당신은, 제임스의 아들이겠군요.”
“아닙니다. 손자입니다.”
“그렇군요. 숲에서 처음 봤을 땐 제임스가 다시 나타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임스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100살도 넘었을 터인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분의 가족이 아닐까 추측되었습니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호기심이 생긴 전 당신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생각 같아선 가까이 가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존'이라고 했나요? 그분이 옆에 있어서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요정이”
나도 모르게 요정이란 말이 나왔다.
“하하하, 요정이라니요. 몇 백년도 넘게 산 저희도 요정은 본 적이 없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갑자기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셔서 다시 이 마을에 오신다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씨는 당신에게 어떤 분이셨습니까?” 남자가 물어왔다.
“제게는... 정말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할아버지의 묘에 자주 가곤 합니다. 무언가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 주실것만 같아서요.”
“그렇군요. 그분은 편안히 잠드셨겠지요.”
“예. 주무시다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과 나의 대화는 막을 내렸다. 마음속의 짐을 덜어 놓은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은 축제의 밤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광장 한쪽 구석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마란스를 찾지 못했을 때에는 나도 불로불사의 몸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알게 된 것은 슬픈 현실뿐이었다. 무엇인가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하는 때가 제일 행복한 때인 것 같다. 그 무엇인가를 손에 넣으면 금방 그것에 질려버리고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어쩌면 원하고 갈망하는 것들이 영원히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축제가 끝나고 피곤해질 때까지 먹고 마신 나는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미하엘의 권유에 따라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미하엘과 함께 그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둥글고 투박한 느낌의 탁자 가운데 희미한 촛불만이 방안을 비춰주고 있었다. 나와 미하엘은 마주보고 앉아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내일, 돌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미하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예...동료가 있는지라”
“동료라....그렇군요.” 그는 알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은 바깥세상에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까? 지금쯤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할 텐데요.”
“가끔씩 이곳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긴 합니다.저희도 맘만 먹으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지만 아직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저도 몇백년동안 속세에서 살면서 여러 사람과 어울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 수명이 정해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봤자 상처받는 것은 저 일뿐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한번 태어난 이상 반드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열이면 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요.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하지요.
전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만 존재한다면 참으로 단조로운 회색빛세상이 될 테니까요. 다시 그 상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세상에 나가볼까 합니다. 물론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겠지만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담담하게 말하는 미하엘의 옆모습은 쓸쓸해보였다.
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상처들을 떠안고 살아왔을까? 고작 40년이 조금 넘게 살아온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나는 위로의 말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술잔만 바라봤다.
“그, 그래도 수명이 한정된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한번쯤은 젊은 모습으로 오래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보니까요. 불로불사라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축복도 저주도 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한참 뒤에 내가 꺼낸 말은 내가 보아도 적절한 위로의 말이 되지 못한 것 같았다.
미하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듣고 보니 이제까지 저는 '불로불사'의 몸을 가지게 된 저 자신을 혐오하면서 살아 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축복이라 생각하고 살아봐야겠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미하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뿌연 하늘엔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제 갈 시간이 되었군요.” 미하엘이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다시는 당신들을 볼 수 없겠지요.”
“글쎄요 어쩌면 조만간 바깥세상에 나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말을 듣고 다시 바깥세상에 나가보고 싶어졌습니다.”
바깥으로 나오니 안개가 끼어있어서 사물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마을 입구에는 어제 보았던 사람들이 나를 배웅하려고 나와 있었다.
제각각 모자를 벗어 인사하거나 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주기도 했다. 비록 하룻밤의 축제를 함께 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마음씀씀이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제와는 다르게 말이 없는 미하엘을 따라가면서 나도 모르게 그를 유심히 살피게 되었다.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이가 몇 백년 전에 살았던 인간이라는 게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젊디젊은 얼굴이었지만 짙은 회색의 눈동자만은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제가 안내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미하엘과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내가 그를 처음 본 곳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미하엘을 요정이라고 믿었었지...
“그리고 드릴게 있습니다.”
어떻게 작별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나에게 미하엘이 내민 것은...한 송이의 아마란스였다.
“이 꽃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이별의 선물로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꽃을 본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 숲에 온 목적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본 아마란스는 아름답다기보다 처연해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조용히 밀어내었다. 미하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이제까지 좇던 것은 전설이었습니다. 전설은, 전설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미하엘은 내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제임스도 같은 말을 했었지요...”
“그렇습니까? 할아버지가...”
안개가 걷히고 서서히 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언제 한번 할아버지가 살던 집에 놀러 오시죠. 지금은 저의 집입니다만...”
“예, 꼭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딱히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한 뒤 미하엘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렸다.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미하엘이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배웅해 줄 듯한 느낌이 들었다.
IV. Epilogue
‘댕, 댕, 댕’
어디선가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너무나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어머, 누가 다녀갔나 봐요.”
아내가 조금 놀란 듯 말했다.
할아버지의 묘 앞에는 빨간빛을 담뿍 머금은 아마란스 한송이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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