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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예슬 소비자주거학전공 08
노란색 꽃을 테마로 한 카페는 여기 저기 꽃잔치였다. 천장에도 꽃, 바닥에도 꽃, 쇼파에도 꽃무늬가 만발했다. 탁자 유리 밑에는 말린꽃이 끼워 넣어진 것을 보고 S는 경악할뻔 했다. 바짝 말라 비틀어져 결이 보이는 노란 꽃잎 옆에 '금로매: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관목. 물싸리라고도 불리움' 이라고 써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물싸리로 불리우든 물싸대기로 불리우든 S가 알 바 아니었다. S는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어젯밤 먹다 체한 노란 카레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카페 분위기가 참 좋죠? 인테리어도 예쁘구요. "
S앞에 마주 앉은 Y가 말했다. 그가 칸막이 대신 걸린 노란 커텐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S를 다시 한 번 경악하게 만들었다. 노란 커텐은 정확히 말하자면 노란색 그라데이션 커텐이었다. 밑으로 내려올수록 색이 점점 엷어지다가 끝은 가닥가닥 나뉘어져 말려있는 것이 촌스럽다 못해 병맛이었다. S는 차마 움직이지 않는 입매를 끌어올리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Y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메뉴판은 검은색이었다. 이 공간에 무채색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S를 위로해주었다.
" 뭘로 시킬까요? "
평소라면 S는 오렌지 주스를 시켰을 것이다. 그녀는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100%과즙이든 설탕물에 아세트산옥틸(각주1: CH3COOC8H17, 오렌지향을 냄)을 탄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어했지 감귤류에 속하는 주황색 열매를 갈아 만든 액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S는 이름 소비를 즐긴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름은 말 그대로 이름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에 곧잘 집착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생겨난 이후 나타난 사람들의 오랜 습관이었다. 습관은 시간이 갈수록 괴팍해지고 구체화되기 때문에 현대인의 이름 소비, 즉 허상 소비는 예전과 비교할 것이 못됐다. 사람들은 루이비통 '가방'대신 '루이비통'가방을, 스타벅스'커피'대신 '스타벅스'커피를 소비했다. S는 '루이비통'가방과 '스타벅스'커피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세트산옥틸을 쉽게 들이킬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이 그녀가 이 '카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S가 디자인을 공부하기 때문에 그랬다. 이름이 가장 중요한 현대 소비 트렌드에 걸맞지 않게 S는 디자인 역시 중요시했다. 디자인이 결부된 상황에서 S는 짐짓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이곳은 최악의 이름과 디자인의 공집합이었다. 이 집 간판에 스타벅스 로고가 그려져 있어도 S는 이곳의 인테리어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카페 디자인은 후졌다. 후지다 못해 후지산 대폭발급이었다. 용암이 줄줄 흘러나와 S의 발밑을 메웠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은 인테리어가 S가 그 동안 배워왔던 디자인 철학, 개념, 생각 따위를 녹여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뜨거운 용암 속에 잠식하는 듯한 기분을 떨치고 싶었다.
그래서 S는 오렌지 주스를 시키지 않기로 했다. 오렌지 주스는 수만 가지 색을 띠었지만 보편적으로 노란색으로 보였다. S는 노란색에 크게 악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노란색은 사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콜라라고 대답하기로 하였다.
저는, 콜라를 먹겠어요.
" 저는.. "
" 이 집은 차가 유명해요. 모두 꽃차 종류인데 향이 특히 좋아요. "
Y가 웃으며 말했다. Y가 메뉴판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가 소리 내어 웃지 않았기 때문에 S는 그의 눈꼬리가 휘어지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고 추측하였다. 실제로 Y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 카페를 아주 좋아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그는 메뉴판을 그녀 앞으로 돌려주고는 몇 가지를 추천했다. 메뉴판에는 차 이름대신 꽃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것은 산수유꽃이고 이건 개나리에요. 이건 홍매화인데 빛깔이 아주 예뻐요. 찻물도 곱게 나오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산수유꽃을 좋아해요. 어렸을 때 집 마당에서 키웠었죠. 다른 꽃들도 많았는데 유독 애착이 갔어요. 지금 사는 자취집에도 화분이 있어요. 힘든 일이 있을 때 바라보면 위로받는 느낌이에요. 꽃이란 참 신기하죠. 작은 씨앗에서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나는 걸 보면 경이롭기 까지해요. 시간이 지나 꽃이 지게 되면 너무 안타까워요. 가끔을 슬프기도 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피어나니까요… 죄송해요. 말이 너무 길었네요. 뭘로 하실래요? 저는 산수유꽃차로 할래요.
Y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감성적인 성향을 가지거나 감성적이며 또 감성적일 수 있다. 그 중에서 Y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Y는 꽃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했다. 그는 구름이 대기 중 물방울의 집합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하루 일상은 자취집 침대맡에 놓인 산수유꽃에게 인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산수유꽃 이름은 덕구였다. 정확히는 김덕구. 김은 Y의 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애정을 가진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는 하였다. 이제까지 그가 이름을 지어준 것들은 아끼는 머그컵(김머그), 아버지께 선물 받은 만년필(김만년), 2년째 쓰고 있는 핸드폰(김드폰) 등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가 감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Y는 이 카페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Y의 설명을 듣는 S는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컴퓨터를 좋아하고 삼각자를 좋아했다. 그녀는 구름이 하늘에 그려진 양떼나 솜사탕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하루 일상은 최신 터치폰으로 하루 일정을 확인하면서 시작했다. 최신 터치폰의 이름은 애니콜 SCH-W770이였다. 머그컵은 스타벅스 매장에서 샀고 만년필은 쓰지 않았다.(각주2:그녀는 일회용 볼펜을 사용한다. 각주2-1:그녀는 리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감성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지고 있지만 많지는 않았다. 그회용 볼펜을이 카페가 별로였다. Y의 설명에 닭살이 돋았다. 그녀는 Y 모르게 양팔을 문질렀다. 산수유? 홍매화? 아름다운? 모두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와닿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의 콜라가 용암 속에 녹아버린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살짝 언짢아하며 대답했다.
" 저도 같은걸로요. "
차가 나왔다. 더운 물에 꽃을 띄웠다. 노란 꽃이 가라앉으며 향기를 내뿜었다. 찻잔에 꽃무늬가 있는 것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중략 - S는 찬찬히 Y를 뜯어봤다. Y는 훈남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S의 마음에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잘 적응한 S는 (그가 감성적이든, 산수유꽃을 좋아하든, 자신을 이 카페로 데려왔든) 만족스러웠다. Y와 눈이 마주친 S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Y는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차를 마시는 모습이 예뻤다. 소개팅에 나오길 잘했다고 느꼈다. 주선해준 K가 고마웠다. K는 Y의 동네 친구이자 S의 대학 선배였다. K는 오징어 조림을 좋아했다. 누구나 K를 설명할 때면 '그(그녀)는 오징어 조림을 좋아해'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K의 가장 큰 특징이고 유일한 특징이었다. K는 그런 사람이었다.
" K는… "
" K선배는 오징어 조림을 좋아하죠. "
" 맞아요. "
" 아주 유난스럽게 말이에요 "
" 그것도 맞아요. "
" 언제까지 저한테 존댓말을 쓰실 거에요? "
" 아까 그게 마지막 존댓말이었어. "
" 헐"
S가 멍때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Y가 이번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바람에 둘 사이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찻물은 우러났다. 둘 사이에 따스한 공기가 맴돌았다. 카페 안의 모든 것들이 좀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둘은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촌스러운 노란 커텐, 꽃잎이 떠있는 찻잔,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 반쯤 꺼진 쇼파, 창밖에 오가는 초딩들… 이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다가옴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끝이 말린 머리카락, 깨끗이 정돈된 손톱, 찻잔에 서리는 김, 끝에 금이 간 테이블 유리, 카페에서 틀어놓은 삼류 유행가… 이 모든 것들이 부드럽게 밀려옴을 느꼈다. 둘은 이것이 무언가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를테면 사랑이었다. 창밖의 나뭇잎은 붉은빛을 띠는데 둘의 마음엔 봄바람이 불었다. 가슴 저 안께서 부터 살살 간질여오는 것들을 느끼며 둘은 수줍게 웃었다. 찻물은 여전히 우러나고 있었다.
" 꽃을 아주 좋아하시나 봐요. "
S가 말했다. 그녀는 컴퓨터와 삼각자를 좋아했다. 꽃은 하위권이었다. 그러나 Y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된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서 꽃의 순위가 물밀 듯 차올라 컴퓨터를 제쳤다. 당장 내일부터 구청에서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지역구민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원예 수업에 나갈 수 있을 만큼이었다. 삼각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S의 삼각자에 대한 애정은 상상 이상이었다. S는 삼각자를 처음 본 순간 최소한의 직선으로 이루어진 최대한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30°, 60°, 90° 반듯이 나누어져 있는 비율의 정갈함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투명하면서도 유연한 플라스틱 몸체,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는 기능적 효율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는 삼각자를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꽃은 삼각자보다 하나 아래 순위에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 네... 아니, 응.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서 그런지 애착이 커. 다른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 처럼 나는 꽃을 키우는 거지. 꽃은 태어나고, 자라고, 피어나고, 지는 매 순간마다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어. 그러고 보니 S씨는... 아니, S는 프리지아꽃을 닮은 것 같아. 작고 예쁜 것이… S는 꽃을 좋아하니? "
그리고 이로써 꽃은 삼각자를 제치게 되었다.
" 네. 좋아해요. 실은 아주 많이… "
방금 전부터 그렇게 됐어요.
그녀는 불필요한 말은 생략하기로 했다. 그가 자신과 닮았다고 말한 프리지아가 어떻게 생긴지조차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S는 꽃이 좋아졌고 그가 좋아졌다. 곱슬끼 있는 머리칼과 소매단에 달린 연두빛 커프스 버튼이 예뻤다. 말을 꺼낼 때 마다 존댓말과 반말을 번복하며 실수하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S는 평소에 이성적이고 냉철하다는 평을 듣는 자신이 이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 놀라웠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이었다. 그녀는 그 힘에 맥없이 끌려갔다.
Y 역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둘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오늘 S와의 만남은 운명 같았다. 그는 감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혹은 감성적인 사람인 동시에 운명론자적 면모를 쉽게 엿볼 수 있었다. Y는 오늘의 만남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약속이라고 믿었다. S는 그의 필연적인 운명의 상대임이 분명했다. 운명의 사랑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처럼 그를 덮쳤다. 그는 피할 새도 없이 사랑에 흠뻑 젖었다. 차를 다 마시고 카페를 나서는 내내 둘을 감싸는 공기가 따스하다 못해 분홍빛으로 변해갔다.
- 중략 -
둘은 길을 걸었다. 초저녁이 되자 하늘 저 끝에서부터 붉은 노을이 그려졌다. 길은 한산했다. 가로수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가에 서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가로수의 이파리들이 서로 부대끼며 소리를 냈다. Y가 슬쩍 S의 손을 잡았다. S는 손을 빼는 대신 쑥스러워 했다. 조금 더 걷자 S의 왼쪽 편으로 너른 꽃밭이 나왔다. 평소라면 별 감흥 없었을 S가 크게 미소 지으며 감탄했다. Y는 꽃에 다가가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꽃밭 가득 보라색, 붉은색, 노란색, 하얀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들은 모두 프리지아였다. Y는 다시 한 번 오늘의 만남이 운명임을 느꼈다.
" 프리지아야. "
" 정말요? "
S가 놀라움과 기쁜 기색을 띠며 말했다.
" 여기 이 노란 꽃… 이게 너와 닮았어. "
노란색 프리지아는 앙증맞았다. 작고 예쁘다는 그의 말이 딱 맞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꽃에 얼굴을 대어봤다. 상큼한 꽃향기가 맡아졌다. S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고 Y에게 웃어보였다. 그것을 본 Y가 좀 전에 그녀가 얼굴을 대고 있었던 노란 프리지아를 꺾어들었다. 툭 하고 꽃줄기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S의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Y는 꽃머리를 잡고 줄기를 둥글게 말아 반지모양을 만들었다. S의 손을 잡아끌어 다 만든 것을 검지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꽃반지야. Y가 말했다. S는 대답 없이 그것을 바라봤다. 하얀 손가락에 끼워진 노란 꽃반지가 썩 잘어울렸다. Y가 만족스러운 눈길로 예쁘지?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S는 대답대신 몸을 떨었다.
" 예쁘지 않아? 너에게 어울려. 이 반지를 너에게 바칠게. "
" ... 안예뻐요. "
" 응? "
" 안예쁘다구요! 이런건 혐오스러워요! "
S가 좀 전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 Y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놀랐다. 그의 뇌 속에서 뉴런들이 빠르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뇌세포들이 자글거리며 그녀의 반응에 대한 인과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p→q와 같은 명제로 명쾌하게 풀어내보려 했지만 힘들었다. 결국 Y는 S의 행동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대신 모든 것이 그녀 혼자만의 감정적 이유 때문이라고 치부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감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이 한순간 포화상태에 이르러 폭발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그럴 때가 있었다. 그래서 Y는 S를 이해해주고자 하였다. Y는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 꽃이 마음에 안드니? "
" 꽃이 마음에 안드냐구요? "
S가 신경실적으로 손가락에서 꽃반지를 빼어내며 말했다. 한층 격양된 목소리가 꽃향기와 함께 허공에 퍼졌다. S는 여전히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며 Y를 쳐다봤다.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Y가 가증스러웠다. Y의 모순된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꽃이 자기 삶 중 일부인양 떠들어 대다가 태연히 그것을 꺾어냈다. 그것이 머그컵이었다면 S는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Y가 꽃 대신 머그컵을 깼다면 S는 그것을 웃으며 치워줄 요량이 있었다. 그러나 Y는 머그컵 대신 꽃을 깼다. 그래서 S는 다시 소리쳤다.
" 당신 꽃을 좋아한다면서요! 사랑한다면서요! "
" 그래, 맞아. 나는 꽃을 사랑해. "
"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꽃을 꺾을 수 있죠? "
" S야, 그게 네가 화난 이유니? 꽃을 꺾은 것이 화난거야? "
" 아니요! 제가 화가 난건 '당신'이 꽃을 꺾은 것이에요. 당신은 아까 꽃이 시들면 슬프다고 말했잖아요. 안타깝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방금 당신은 피어있는 꽃을 꺾었어요. 당신은 피어있는 꽃을 죽였다구요. "
" 내가 꽃을 꺾은거지 뿌리를 뽑아낸 것이 아니잖아. S야, 나는 꽃을 죽인 것이 아니야. 다만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아름다울 것 같아서 꺾어낸 것뿐이야. "
Y가 S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Y는 그녀를 이해하려 애썼다. 그는 그녀가 자신보다 3살 연하임을 생각했다. 그녀는 아직 어리고 여리기 때문에 꽃 한 송이의 꺾임마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황스럽지만 이해가 갔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S는 화가 많이 난 모습이었다. Y는 그녀를 부드럽게 타이르기로 마음먹었다.
" 당신의 꽃이 져버렸을 땐 슬프고, 길가에 난 꽃을 꺾어버릴 때는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요? "
"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S야, 나는 모든 꽃을 사랑해. 그러나 꽃은 본래가 유약한 존재야.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비가 조금만 강하게 내려도, 땅이 조금만 바싹 말라도 죽어버리는 것이 꽃이야. 나는 그런 꽃의 유약한 아름다움을 사랑해. 그러나 그것이 내가 모든 꽃을 끌어안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니? "
" 아니요! 당신이 꽃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수선화가 지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면, 당신은 모든 꽃을 끌어안아주지 못할망정 부러트리진 않아야하는 거에요. 당신은 유약한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유약함이 꽃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을 모르나요? 결국 당신은 꽃의 죽음의 이유를 사랑하는 거에요. 당신의 사랑은 모순 덩어리에요. "
" S야, 나는 단지 너에게 꽃을 주고 싶었을 뿐이야. 너에게 바치기 위해 꽃 한 송이 꺾어낸 것이 그렇게 화가 나니? ”
" 나에게 꽃을 바친다고요? "
" 그래. 그게 뭐가 잘못됐니? "
" 그 꽃은 당신 소유가 아니라구요. 당신이 나에게 바치고 말고 할 것이 아니었어요. 꽃은 제 힘으로 자랐어요. 당신의 도움이라고는 하나 없이 스스로 양분과 햇빛을 흡수하며 자랐다구요. 그런데 오늘 처음 그 꽃을 본 당신이 그것을 꺾어내며 나에게 바친다고 말했죠! 당신이 하등 그럴 자격이 있나요? 내가 그것을 갖고 싶다고 말한 적 있나요? 내가 그것을 나를 위해 꺾어달라고 말한 적 있냐구요! 당신은 꽃을 꺾어 나에게 바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꽃을 죽이고 그 책임을 나에게 돌린 거에요. 뿌리를 뽑지 않았으니 죽인게 아니라구요? 죽인 것과 다르다구요? 그러면 이 꽃은요? 당신이 연약한 몸체를 짓이겨 끊어버리기 전만 하더라도 꽃은 살아있었어요. 흙에 뿌리를 박고 숨 쉬고 있었다구요. 근데 그걸 당신이 죽인거에요. 당신 때문에 뿌리에서 떨어진 꽃은 갈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말라 비틀어 죽어 버리고 말거에요. 당신이 자초한 죽음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그 죽음의 이유를 나에게 돌렸어요. 이로써 나는 말라가는 꽃 옆을 지키며 죄의식에 빠지게 되었죠. 죽인건 당신인데! 당신이 나에게 바치기 위해 꽃을 꺾었다고 말하는 순간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 S야, 아냐. 네가 꽃을 받을 자격이 있었기에 내가 꽃을 꺾은 것뿐이야. 죽음이라니? 죽음의 이유라니? 겨우 꽃 한 송이에 네가 이렇게 흥분할 줄 몰랐어. "
" 당신은 파렴치에 이기적이기까지 하군요. 겨우 꽃 한 송이라구요? 그 꽃 한 송이가 당신의 산수유였다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건가요? 내가 꽃을 받을 자격이 있으면 당신이 꽃을 꺾는게 옳은 거였나요? 나에게 자격이 있으면 그 뿐, 꽃을 희생해서 나에게 줄 필요는 없었어요. 꽃을 나에게 바친다구요? 헌정(獻呈)한다구요? 당신이 꽃에게 무얼 해주었는데 나에게 그걸 바쳐요? 난 그게 필요하다 말한 적 없어요! 당신은 내가 꽃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살펴보기 전에, 그 꽃이 어떻게 자라났는지 생각했어야 했어요. 이 꽃에 주인이 있었다면 어떻게 할거죠? 꽃주인이 나타나면 뭐라고 말할거에요? 그 사람도 내가 이 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모두 당신의 오산이에요. 당신이 실수한거라구요. 나도, 꽃도, 꽃주인도 모두 화나고 억울할 뿐이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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