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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담 국어국문학전공 03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다. 시계를 보니 7시, 약속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다. 평소 오전이 끝날 무렵에야 겨우 잠에서 탈출하는 나약한 몸인데, 오늘은 제 주인의 설레고 두근대는 심정을 이해하는지, 저절로 잠에서 깼다. 상쾌하고 화창한 날, 기분마저 유쾌하다. 뭐든지 자신 있고, 무엇을 하든지 좋은 결과만 나타날 것 같은, 오늘은 고백하는 날이다.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된지 석 달 만이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본 이후 내내 좋아했다. 예쁘장한 이목구비에 무엇보다 눈이 맑고 그 빛이 깊어 신비로운 매력을 내뿜었다. 헤프지도 내성적이지도 않으면서 일정 수위를 넘었을 때 경계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반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주변에서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누가 좋아한다는 둥, 고백했다는 둥 단순한 소문부터, 고가의 지갑과 향수를 선물했는데 거절했다는 얘기, 사람 많은 도서관 앞에서 무릎 꿇고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얘기 등 비교적 자세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특히 도서관 고백남을 위해 일부러 사람 없는 곳으로 옮겨 거절했다는 얘기는, 그녀의 배려를 엿볼 수 있는 한편, 아득한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한단 말인가!
지난 석 달간 조바심과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행여 다른 놈이 낚아챌까 하는 다급함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조바심으로 승부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 마련이다. 서투른 고백보다 섣부른 고백이 훨씬 위험한 법.
신입생 특징 중 두드러지는 부분은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과 설렘을 품고 있는지라,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려 하고, 낯선 이에 대한 경계도 옅어진다. 그녀도 예외일 수 없다. 환영회 이후 오고가며 조금씩 그녀의 경계를 풀어놓는데 치중했다. 인사할 땐 언제나 웃는 얼굴로, 가끔 숙제니 조별 모임 등의 핑계를 대며 얘기도 하고 몇 번 식사도 같이 했다. 가끔씩 전화통화는 필수다. 사소한 문자는 자칫 무시당할지도 모르나, 그녀가 한가할 법한 밤에 통화하여 즐겁게 해주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일련 과정에서 가장 애먹었던 건 감정을 숨기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녀와의 관계는 친구 사이 그 이상일 수 없었다. 그녀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다. 장난을 쳐도 진심을 담아선 안됐고, 필요 이상의 과잉친절 역시 금물이다.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온갖 공세를 펼쳐도 관심 없다는 표정과 행동으로 일관하고, 조금은 거칠게 나가주는 것이 핵심이다.
어젯밤, 메신저 대화는 일종의 '쓰루패스'였다. 메신저 창에 로그인 되어있는 그녀의 대화명 '초콜릿'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냅다 질러버렸다.
"내일 시간 있어?"
"왜?"
"엄마 생신이라서 시계선물 좀 할까 하는데,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도와주라."
"효자구나. 근데, 나 내일 약속 있는데."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떼쓰듯 만나자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서 그녀의 마음을 돌려야 했던 찰나, 그녀가 뜻밖에 손을 내밀었다.
"오후쯤에 끝날 것 같은데, 저녁엔 어때? 여섯시."
토 달 것도 없이 무조건 OK, OK!다.
오후가 돼서야 온 몸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전율마저 느껴졌지만, 긴장 따위에 오늘 일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노란 장미 20송이도 잊지 않았다. 준비는 끝났고, 주사위 던질 일만 남았다.
약속시간에서 20분쯤 지났을까? 저만치서 그녀가 걸어오고 있다. 뽀얀 피부에 긴 생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그녀. 하얀 스커트에 파란 티셔츠가 수수해보이면서도 그녀의 매력을 한층 돋보였다.
"좀 늦었지?"
"넌 어째 칠칠맞게 매번 지각이냐?"
"언제 그랬다고. 그렇게 나오면 나 간다."
"장난이야. 그리고 자, 이거."
노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널 좋아해'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뭐야? 웬 꽃이야?"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는 길에 '떨이'라길래 하나 샀어. 잘했지?"
"어휴, 말만 잘했어도 예쁘게 봐줄 텐데. 좀 포장해서 말해주면 덧나니? 밉상아."
눈 흘기는 것조차도 예쁜 그녀인데, 이대로 그녀에게 밉상으로 박히진 않을 런지, 마음은 울상이다.
미리 봐두었던 터라, 귀금속 매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가에 늘어선 매장들 중 제법 규모가 큰 매장으로 들어서니, 한쪽 귀퉁이에 시계 매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끄트머리 진열대부터 시계를 고르는데, 그녀는 뭐가 그리 열심인지 연신 질문을 퍼붓는다. 어머니의 스타일, 취향, 키, 몸무게, 좋아하는 색깔, 혈액형, 성격 등 그 조그만 시계 하나 사는데 세심한 것까지 신경써주는 그녀가 더없이 고마웠다. 이것저것 시계를 꺼내보고 다시 돌려놓기를 수십 회. 주인아저씨 얼굴에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시계 고르는데 여념이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녀가 활짝 웃으며 시계 하나를 건넨다. 척 보기에도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것이 어머니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잘 골랐지?"
"응, 예쁘다. 엄마가 좋아하시겠다. 고마워, 보답하는 의미에서 맛있는 거 사줄게."
저녁식사 후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 고마웠어."
"뭘, 어머니 선물 고르는 건데,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게다가 맛있는 저녁도 사주고, 이 꽃다발도 줬잖아."
"꽃, 마음에 들어?"
"응. 예뻐. 빨간 장미만 받아서 그런지, 노란 장미는 신기해."
"그래?"
심드렁한 척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이미 기죽었다. 그녀가 인기 많다는 게 새삼 실감되면서, 차일 것 같다는 불안감과 친구로 지내자는 타협마저 머릿속을 맴돌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수많은 생각이 스쳐간다. 나를 좋아할까, 여기서 접을까, 한번 질러볼까,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 끝에 떠오른 건 예전에 느꼈던 괴로움이었다. 그녀를 가질 수 없어서 느꼈던 지독한 괴로움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괴로움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거절당할지라도 마음표현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긴 싫다.
"나 너 많이 좋아한다."
"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쳐다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그동안 표현도 못하고 내내 숨겼는데, 네가 너무 예쁘고 소중해서 더 이상 숨기기가 힘들다. 여러모로 부족한 나지만, 네가 즐겁고 행복하도록 앞으로 많이 노력할게. 받아줄래?"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법정의 피고인 마냥 고개만 떨어뜨린 채 그녀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순간인데도, 영겁과도 같은 시간을 지나는 느낌이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고개를 살며시 드니,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입을 가린 채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나? 꿈인가? 별의별 생각이 스치고, 여전히 그녀의 판결을 기다렸다.
"어휴, 귀여워. 그걸 왜 이제 말해?"
"어?"
"알고 있었어. 예전부터 네가 좋아하고 있던 거. 나한테 부담주지 않으려고 항상 웃고, 장난치고 즐겁고 재밌게 해주는 거. 나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귀여웠어. 근데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바보."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믿겨지지 않는다.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앞으로 노력한다고 무슨 말이든 해야 되는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꿈에 그렸던 그녀인데, 환상처럼 여겼던 그녀인데, 그 환상이 지금 현실로 나타났다.
입을 삐죽거리던 그녀 하는 말.
"뭐해? 빨리 나 집에 데려다 줘. 늦으면 혼난단 말이야."
"어……. 그래."
그녀가 살며시 팔짱을 낀다. 꿈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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