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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을 읽고, 인간 본성의 딜레마52호/가대人 2010. 2. 26. 01:02
다카노 가즈아키,『13계단』, 2005, 황금가지
김유리 중국언어문화전공 07
“사형을 당하는 놈들이란, 잡히면 사형이란 걸 알면서 저지르는 것들이야.
…… 사형 제도를 유지시키는 것은 국민도 국가도 아닌,
남을 마구 죽이고 다니는 범죄자 본인이야.”
이는 두 범죄자를 사형, 아니 살인한 난고가 분노 섞인 푸념을 하는 대목이다. 주인공 난고의 직업은 교도관이었다. 교도관이 원래의 꿈은 아니었으나, 형 대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우연히 얻게 된 직업이었다. 그러나 범죄자를 관리함으로써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고, 범죄자를 교화해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비교적 순탄한 난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두 번의 사형집행이었다. 그는 비인간적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경멸했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그 이상으로 갚아주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형, 그 처절한 비극을 목격함으로써 사형제에 회의를 품게 된다. 범죄자들은 사형제가 존재함을 알고도 범행을 저지른다. 사형 직전 그들의 울부짖음은 회개가 아니다. 단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두려움에 찬 가식일 뿐이다. 사형수를 죽임으로써 본인은 물론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난고는 사형, 그 응보 주의적 처형 방법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진다. 사형은 제 3자의 또 다른 보복이며, 살인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난고는 사형 집행이 아닌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법의 모순과 인간 도덕성 자체에 대한 회의로 괴로워한다.
이러한 고뇌에 시달리던 난고는 교도관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그 무렵 익명의 독지가로부터 의뢰를 받는다. 그 의뢰란 무고한 사형수 ‘료’의 누명을 벗기는 것이었다. 사례금도 걸려있었다. 난고는 생각했다. 한 사형수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그간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으리라고. 이에 난고는 준이치 라는 청년을 찾아가 함께 수사할 것을 제안한다. 준이치는 난고가 교도관이었을 때 수감돼 있던 청년으로, 상해치사 전과자였으나 가석방으로 풀려난 상태였다. 준이치는 내키지 않았으나 사례금 때문에 난고의 일에 동참하게 된다. 난고와 준이치는 거의 백지상태에서 수사를 시작한다. 하나둘 씩 단서를 발견하며 두 사람은 진범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드디어 범인은 ‘그’로 압축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진범과의 정면 대결이 펼쳐진다. 진범이 밝혀짐과 동시에 ‘익명의 독지가’의 계략과 준이치의 실체까지 모든 진실이 폭발하듯 드러난다. 마침내 사형수 료의 사형집행은 취소된다. 그러나 그 결과를 맺기까지 희생 아닌 희생, 끝없는 모순의 반복들이 불편한 여운을 남기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13계단의 줄거리는 살인을 저지른 두 범죄자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벌이는 추리와 난투다. 다루는 내용 자체에 모순이 내재해있다. 사람을 죽였던 사람들의 사람 살리는 이야기인 것이다. 사형을 살인이라 믿고, 스스로 살인범이라 여기는 전직 교도관 난고, 상해 치사죄로 수감되었다 가석방으로 풀려난 준이치가 바로 그들이다. 이 이야기는 사형제 존폐 여부에 대한 진부한 논쟁을 다시금 들먹이려는 게 아니다.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모순, 그 모순으로 괴로워하는 한 인간의 고뇌다. 이 이야기에서 수사의 진전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이 난고의 내면의 변화다. 처음에 난고는 죄책감을 덜어낼 목적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수사를 진행하며 끊임없는 모순과 딜레마에 시달린다.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경멸, 도덕의 모순에 대한 갈등으로 괴로워한다. 난고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는 모순과 그로 인한 고뇌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각 인물들이 빚어내는 갈등 관계는 풀리지 않고 순환하는 근본적 물음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그 근본적 물음의 첫째는 인간은 악을 통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본성에는 악이 내재해있다. 이에 인간은 선을, 도덕을, 법을 규정하여 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준이치, 독지가, 진범의 존재는 그 믿음을 철저히 깨뜨리게 한다. 이들은 선을 표방하면서도 깊이 감추고 있던 악에 의해 지배당하고 마는 인간들이다. 즉 악을 저지른 가해자인 동시에, 악에 조정당한 피해자인 것이다. 그들은 악을 악으로써 보복하려했기 때문에 그 모순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인물을 통해 인간이 악에 지배당할 때,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지 묘사한다.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악’이나, 내가 하는 행위는 ‘정의’다. 그것이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어떤 피해가 갈지는 알바가 아니다. 나는 그저 숭고한 나의 정의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각오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이기와 오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을 통해, 조금 더 냉철한 시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둘째는 ‘인간은 악하다’는 명제를 전제로 하는 물음이다.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선을 실현한다면, 이는 순수한 선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난고와 준이치의 경우가 그러하다. 사형수의 누명을 벗겨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선이다. 그런데 이를 수행하는 사람은 살인자다. 그렇다면 난고와 준이치는 순수한 선을 실현시킨 것인가? 여기에 또 다른 딜레마가 덧붙여진다. 사형수의 누명을 벗긴다는 것은 진범을 찾는 것이다. 진범을 찾는다는 것은 또 다른 사형수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사형수가 다른 이로 바뀌는 것일 뿐, 사형은 예정대로 집행된다. 한 생명을 구하는 대신 다른 이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한 일은 사람을 살리는 행위였나? 죽이는 행위였나? 작가는 이러한 모순과 딜레마 속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지, 난고와 준이치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작가가 주는 힌트가 있다면 딜레마 속에서 옳고, 또 그른 선택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각자의 입장에 따라 조금이라도 후회가 덜 남는 방향으로의 선택이 최선일 뿐이다.
셋째는 선과 악의 순수성에 대한 문제다. 즉 악한 마음으로 저지른 선한 행위, 선한 마음으로 저지른 악한 행위 중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익명의 독지가는 재수사를 의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생명을 구한 선을 행했다. 그러나 그 행위의 동기에는 악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결국 사형수를 구한 일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이면서 악이다’이다. 이 이야기에서 요구하는 것은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아니다. 우리의 사고가, 관점이 더욱 솔직하고 유연해 질 것을 요구한다. 순수한 선, 순수한 악이란 없다. 인간 자체,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은 불완전하다. 인간이 만든 선과 악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존재가치와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해지려는 노력을 한다. 또한 모든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다. 이러한 노력과 겸손이 인간의 존재가치와 업적을 높이는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선악의 딜레마, 즉 인간 본성에 내재한 모순과 행위의 애매성은 인간이므로 마땅히 가지는 숙명적 고뇌다. 이는 어느 단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되거나, 어느 단 하나의 명제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 물음, 그 넷째는 인간이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평가는 점수, 평판 등을 넘어서 조금 더 고차원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에 대한 평가와 타인의 평가가 융합해 만들어진다. 또한 평가를 통해 타인에게 상 또는 벌을 준다. 타인을 벌하기 위해 평가를 내리는 것,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로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없다. 이에 도덕과 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모든 판단의 근거를 도덕과 법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도덕과 법은 정당한 것인가? 법은, 잘못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가? 피해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는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 묻는다면 모두 ‘아니오’로 대답했을 것이다. 그들은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법이 내놓은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판단과 행동의 근거가 되었던 것은 지극히 사적인 자신의 가치관이었다. 애초부터 인간이 인간을 평가 혹은 심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13계단은 반전이 있는 추리소설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기저에는 우리가 감추고자 했던 인간 본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또한 우리가 답을 내리기 주저했던 질문들을 다시 상기시키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가치를 깎아내린다거나 복잡한 질문들로 우리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진솔한 태도, 객관적 시각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지나치게 솔직한 진실은 때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정직하다. 정직한 진실은 우리가 냉철한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악하다. 이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선하다. 이 또한 진실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많은 모순과 딜레마로 인간 스스로를 고뇌에 빠뜨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순을 무조건적으로 기피하지 말고, 어느 하나의 답으로 귀결시키려 하지 말고, 사실을 사실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혹자는 인간이 악을 이용해 진화했다고 말한다. 조금 더 자극적으로 말하자면 살인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자연 질서에 적응해야 했다. 이에 인간은 타인으로부터의 침입, 약탈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따라서 적대자를 처치하고, 번식에 필요한 필수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 수단이 살인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이는 살인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악을 통해 진화했다. 고로 ‘악은 진화의 원동력이었다.’ 이 사실이 듣기 거북한가? 이는 사실이며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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