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위원 정민
우리는 때로는 아주 쉽게 우리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곤 한다. 꼭 말로 싫어한다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심리적 거부감이 신체적 언어로 드러나는 경우는 비일비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다수와 다른 소수자에 대한 선입견으로 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인터넷으로까지 확대되어 그것이 사회적으로 재학습되기도 하고, 많은 소수자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에서는 차별금지법이 입법을 했다고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종교계의 거센 반발이 있기도 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8월 12일 반차별공동행동이 주관하는 <차별금지법, 여섯 가지 이유 있는 걱정 - 차별과 ‘표현의 자유’의 경계>라는 포럼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포럼을 듣기 전에는 ‘차별과 표현의 자유’가 굉장히 예민한 지점에 있는 논쟁이란 느낌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아야 할 권리와 표현의 권리가 팽팽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쉽게 어느 한 권리의 가치가 더 높다고 말할 수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포럼은 어느 권리가 다른 권리보다 우선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에 진정한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유의 반대어는 억압이다. 진정한 자유를 주장하려면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해야하는 주체는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한 이들이 아니다. 다수에 시선에 억압받는 소수자들인 것이다. 모든 표현이 동등하게 자유를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차별적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회적 다수를 완전히 설득시킬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뿌리 깊게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습된 다수는 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학습의 피해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학습을 통해 소수에 대한 선입견을 정당화하는 것은 피해의 재생산이겠다. 이러한 피해의 재생산은 법으로 규제한다고 해서, 또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의에 대해 논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입막음은 소통의 단절을 가져오고 서로에 대한 더 큰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래서 뻔한 결론이지만 해답은 결국 소통에 있다. 소수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사회적 학습을 고발하고 다수의 차별적 발언들을 계속 수정해 주어야 한다. 누구의 표현의 자유가 정당한지는 소통의 가능성을 전제로 조금은 뒤로 미룰 수 있는 문제이지 않을까. 소수와 다수를 구분 짓는 법을 가르치고 그들을 공통으로 억압하는 것은 결국 사회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