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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앵벌이? 그들에 관한 고찰51호 2010. 2. 18. 19:17
NewGood
송경현 영어영미문화전공 07
앵벌이의 사전적 의미
[명사]불량배의 부림을 받는 어린이가 구걸이나 도둑질 따위로 돈벌이하는 짓. 또는 그 어린이. 앵벌이를 하다
계명구도(鷄鳴狗盜)
[명사] 비굴하게 남을 속이는 하찮은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 중국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진(秦)나라 소왕(昭王)에게 죽게 되었을 때, 식객(食客) 가운데 개를 가장하여 남의 물건을 잘 훔치는 사람과 닭의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는 사람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빠져나왔다는 데서 유래한다.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중국의 역사서, 십팔사략..
그 중 전국시대, 즉, 서기전 403년, 한(韓), 위(魏), 조(趙)의 삼경(三卿)이 진(晉)나라를 삼분하여 각각 독립하고, 주 천자로부터 제후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는 시점. 때는 바야흐로, 중국 전국의 제후들이 활약하고, 인재들이 빛을 보던 그 시절,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국시대의 사군(四君) 중 한 사람으로 인재를 좋아하여, 그의 식객이 수천 명에 다다를 정도였다. 그의 슬하에는 많은 분야에 뛰어난 인재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심지어, 거짓말, 도둑질, 성대모사의 달인까지 그의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전국시대는 수만은 인재들을 앞 다투어 모으려는 시기였지만, 이런 어떻게 보면 부정적(?) 혹은 쓸모없어 보이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마저 그 슬하에 두려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서기전 299년, 맹상군은 진나라 왕궁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인재였기에, 처음에는 엄청난 환대를 받게 되었고, 심지어 진나라의 승상의 직위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굴러들어온 돌에 치인 격이 되 버린 진나라의 신하들은 이를 시기하여, 맹상군을 모함했다. 결국 진나라 왕은 그들의 모함을 듣고 맹상군을 사임 시켰고, 그 같은 인재가 다른 나라에서 정계에 올라 진나라에 위험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맹상군에게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기에, 그 흉보는 맹상군의 귀에 쉽게 들어갔다. 당시 진 소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진왕이 빠져있던 연희(燕姬)라는 여자뿐이었다. 맹상군은 진왕의 마음을 돌리고자, 연희에게 수많은 보물을 주었으나, 그녀가 원하는 건 다른 것 이었다. 그것은 맹상군이 진나라 왕에게 선물했던 보물 중 호백구(狐白裘)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호백구는 당시 엄청나게 진귀한 보물이었으며, 당장 구할 수조차 도 없는 물건이었다.
맹상군과 그 일행이 큰 걱정에 잠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 맹상군의 인재 중 하나였던, 도둑질의 달인(?)이 나서서, 진나라의 핵심부, 즉 왕의 보물창고에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왔고, 기회를 잡은 맹상군은 즉시 그 호백구를 연희에게 보냈다. 그 호백구를 받은 연희는 진왕의 마음을 돌려주었다. 결국 맹상군을 풀어주라는 명이 떨어졌고, 죽음의 위기로부터 한숨 돌리게 된 그의 일행은 엄청난 속도로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뒤, 진왕은 다시 마음을 돌려 그를 죽이기로 결정 하고 추격군을 보냈다. 그때 맹상군 일행은 함곡관(진나라 경계의 요새)에서 발이 묶인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진나라 법에 의하면, 왕의 통관증이 없이는 그 곳을 통과 할 수 없었으며, 또한 닭이 울기 전에는(즉, 아침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무도 그곳을 지나갈 수 없었다. 만약 그 곳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맹상군 일행은 그 자리에서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때, 수많은 인재들 중, 문서 위조의 달인(?)이 왕의 통행증을 위조하였고, 그의 또 다른 인재였던, 성대모사의 달인(?)은 닭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맹상군 일행은 추격군이 쫓아오기 전에 진나라를 탈출 할 수 있었다.
그만큼, 맹상군의 모든 방면의 인재에 대한 애증은, 그의 목숨을 살릴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고우영, 『고우영 만화 십팔사략』, 동아출판)
내가 갑자기 오래된 역사 이야기를 꺼내들며, 맹상군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내가 자주 듣는 잔소리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거의 매번, 길거리나, 혹은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서 구걸을 하는 거지들에게 조금이나마 돈을 주곤 했다. 그럴 때 마다 친구들은 나에게, 저들은 다 불로소득을 도모하는 자들이며, 속칭 앵벌이들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기억 중 하나는,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내가 2,000원을 주고 껌 하나를 샀을 때, 한 친구가 나를 심하게 나무랐던 기억이다.
나는 물론, 그들에게 자선을 할 때, 기꺼운 마음, 그리고 정말 그들을 위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돈을 건낸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려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내 경험상 매우 드물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단 한순간도 나는 그런 구걸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행동이 약 2,300여년 전의 맹상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내가 맹상군의 일화를 예로 들은 것은, 단지 친구들이 나에게, 내가 속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때, 내가 유일하게 반론을 제기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맹상군은 수많은 인재들을 여과 없이 수용했다. 나는 물론 맹상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아니며, 그에 비하면, 한없이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맹상군의 이런 행위를 이용하는 것이, 앞서 말한 친구들의 질문에 가장 적절한 대답이기에, 그를 나의 경험에 끼워 넣고자 한다.
누군가 실제로 나에게, "왜 그들에게 돈을 주냐고," "왜 그들이 단순한 앵벌이일지도 모르는데, 그들에게 돈을 주냐고," 굳이 묻는다면 난 그 말에 반박하기 위해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나는 그들의 거짓말의 기술을 사는 것이라고, 나는 그들이 지하철에서 틀어주는 음악을 사는 것이라고, 나는 그들이 지하철에서 부르는 노래를 사는 것이라고, 나는 그들이 남들 앞에서 자기를 숙이며 구걸하고자 하는 그 용기를 사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들의 진짜일지 모르는 아픔을 덜어주려는 것이라고.”
물론 내 행위가 진심으로부터 나오는 자선 행위지만, 주위 사람들이 “끝까지” 나의 행동에 반론을 제기 할 땐 결국 이런 답변만이 그들의 반론을 그나마 잠식시킬 수 있었다.
혹자는 각박한 사회 속에 그들은 사기를 치는 것이고, 나는 당하는 것이라고.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사기꾼인지, 아니면 정말 돈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인지 누가 알겠는가?
한번은 텔레비전에서 거지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다. 그때 당시 나는 병원 치료 때문에 2호선을 타고 사당역에 가는 일이 잦았다. 그때 항상 2호선 지하철 안에서 구걸을 하는 맹인 부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보았던 그 프로그램에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부끄럽지만 구걸만이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임을 말했고, 나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들은 앵벌이가 아니라, 정말 삶의 힐난에 지친 사람들이었다.
물론 위에서, 나는 그들의 거짓말 기술(+ 여타 다른 기술)을 산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정말일지도 모르는(설령 그 가능성이매우 작더라도)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고자 돈을 건내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답변”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어느 누가 알겠는가?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얼마나 그 돈이 필요한지, 그래서 그들의 자존심마저 포기 할 수 있는지. 나는 사실 가톨릭 신자이다. 성서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준 것이다." 설령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도, 나는 그들의 거짓말 능력을 사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삶에 치이고 정말 힘들어서 구걸을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통은 함께 나눌수록, 덜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나의 주 예수를 위한 것이다.
A Folded-Paper Crane 2007/6/7
나는 그댈 위해,
흔들림속에 빛나던 그 용기를 삽니다.
나는 그댈 위해,
찬란함속에 그늘지던 그 아픔을 삽니다.
그 작은 종이학은
아름다운 그댈 위한 하늘의 작은 선물
그러니 더 이상 부끄러워 마세요.
그대는 너무도 아름다운 달빛의 천사이기에..
By NewGood
(필자의 필명)
2007년, 내가 처음으로 그들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나는 이 시를 통해, 나의 행위를 탐탁치 않는 사람에게, 나의 행위가 그들의 기술을 사는 것이라는 점을 표함으로서 내 행동의 당위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이, 물론 거지를 가장한 앵벌이일지도 모르지만, 난 그들을 믿고, 나에 대해 어떠한 반론을 제기하던 간에 난 나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는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는 말을 많이 한다. 환율은 급등하고, 주가는 바닥을 쳤으며, 물가는 올라가고, 더불어 우리가 오직 수입만 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료인 기름값 역시 매우 비싸다. 청년 실업은 최고치를 기록 중이며, 실업자는 급증하고, 서민들의 복지후생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우리가 우리자신만을 생각하고, 베푸는 것에 인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자신이 힘든 만큼, 세상에는 우리처럼 힘든 사람도 많고,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오히려 이럴 때, 우리 주위의 약자들을 더욱더 기억해야 할 때이다. IMF시절, 너도나도 금 모으기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 했듯이,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우리 주위의 힘든 사람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나눌수록 덜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두서 없는 글에 써 내린 나의 주장에 동의 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하고, 이 각박하고, 힘겨운 세상,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잠시나마 약자들의 고난을 깊게 생각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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