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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넘는 철학77.5호(2021)/뫼비우스의 띠 2021. 2. 23. 15:23
김미성 편집위원
오늘날 철학은 낯설고 추상적인 학문으로 취급되어 비주류로 밀려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 서양 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관련 문헌을 번역하는 독립출판사 ‘전기가오리’가 있다. 전기가오리는 후원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서양 철학 분야의 논문 번역 도서를 포함한 다양한 물질적 혜택을 배송한다. ‘철학 구몬’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전기가오리는 약 6,000명의 후원자들이 있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철학에 매료시켰을까? 성심은 1월 18일 독립출판사이자 학문공동체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전기가오리의 신우승 대표를 서면 인터뷰했다.
전기가오리 같은 자극을 주는 철학
"제가 보기에 당신께서는 외모나 다른 측면들에서 전적으로 바다에 사는 넓적한 저 전기가오리와 아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접근하거나 접촉하는 것을 항상 마비시키지만, 제가 보기에는 당신께서도 지금 제게 그와 같은 뭔가를 가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저로서는 영혼도 입도 마비되고, 당신께 무슨 대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으니 말입니다."(플라톤, 『메논』 中)
전기가오리라는 독특한 이름을 들으면 누구라도 작명의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전기가오리라는 이름은 플라톤의 『메논』에서 따온 것이다. ‘탁월함’에 대해 확신하던 메논이 자신의 논리에 반박하는 소크라테스를 '전기가오리'로 빗대는 데서 단체명을 착안했다.
신우승 대표가 서양 철학에 주력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그가 처음 접한 철학이 동양 철학이 아니라 서양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 철학 중에서도 특히 영국・미국 분석 철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학문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상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영미 분석 철학은 더욱이 젠더, 격차, 인종 등 현대에 등장한 문제를 다루는 데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자가 쓴 텍스트가 정합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나, 철학자 특유의 문체에 담긴 진의를 읽어내는 것이 철학 공부나 연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미 분석 철학을 다룬다는 점에서 전기가오리가 스스로 문제 해결 집단이라 칭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객체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점들』, 『철학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선성』, 『이론적 개념으로서의 건강』, 『예술이란 무엇인가?: 제도론적 분석』과 같이 그가 번역한 논문과 앞으로 출간할 도서의 주제를 훑어보면 그 이유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철학적인 사유나 논의가 필요한 주제를 후원자들과 함께 끊임없이 탐구하기 위함이다.
전기가오리의 ‘철학’과 우리가 매체에서 흔히 접하는 ‘철학’은 결이 다르다. 미디어에 언급되는 ‘철학’은 대부분 인생에 필요한 지혜나 인생관을 의미한다. 신우승 대표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안내를 제시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철학자의 이론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을 넘어 후원자들이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하기까지 전 과정을 거치며 사유하길 원한다.
전기가오리가 바라보는 바다 위
전기가오리는 후원 신청 대기자들까지 존재한다. 이들이 후원하도록 만드는 전기가오리의 매력은 무엇일까? 신우승 대표가 몰두하는 두 지점에서 그 원천을 알 수 있었다.
“첫째는 도서의 물리적 수준입니다. 번역과 편집에 최선을 다하고, 디자인의 측면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아끼지 않습니다.”
ⓒ 전기가오리 홈페이지 전기가오리 후원에 대한 정기적인 물질적 혜택에는 논문 번역 도서와 이에 대한 간단한 해설이 담긴 소책자 <설명 원고 읽고가세요>, 철학과 관련한 하나의 문장을 설명한 <천 논문도 한 문장부터>, <영어 텍스트 읽기를 도와드립니다> 등 다양한 부가 책자로 구성되어있다. 철학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후원자들이 직접 번역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이런 유익한 내용과 더불어 디자인이라는 도구로 철학의 높은 진입장벽을 허문다.
“둘째는 공부 모임의 존재입니다. 전기가오리에서는 상대주의, 분석 형이상학, 언어 철학 등에 대한 공부 모임을 거의 매일 진행합니다. 들어본 적이 있어 공부하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를 모를 때 적극적인 안내를 제공합니다.”
비물질적인 혜택은 인터넷 강의 <인터넷은 논문을 싣고>와 <인터넷은 좌판을 깔고>, 코로나 사태 전까지 진행했던 신청자의 지역을 방문하여 설명하는 <설명 배달 왔습니다>, 그리고 공부 모임이다.
“철학 공부와 관련한 몇 가지 제약을 깨고자 합니다. 그중 하나가 지역 격차입니다. 모든 공부 모임을 온라인으로 제공하여 전국의 누구나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
출판은 교육 서비스의 수단 중 하나일 뿐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 전기가오리의 주목적이다. 따라서 전기가오리는 지역, 학력, 장애, 소득으로 발생하는 격차로 철학 공부를 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철학을 둘러싼 선을 넘다
‘통 속의 뇌’1) 같은 철학적 난문을 진지하게 숙고할 수 있는 주류 철학자들과 달리, 페미니즘 철학자들은 언제나 사람을 체현된 존재로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신우승 대표는 일전에 출간한 「페미니즘 철학」의 구절을 인용하며 ‘통 속의 뇌’가 아닌 인종, 젠더, 격차, 언어 등의 구체적인 문제를 계속해 다룰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전기가오리가 도달할 목적지가 어딘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인종, 젠더, 격차, 언어 등을 둘러싼 현안을 다루고 후원자들과 함께 논의할 문제를 규정한다. 궁극적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공동의 활동을 이어나가겠다는 것이다.
“격차가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격차인지가 더 선명해지고, 격차의 상당수가 사실은 차별이라는 점이 명확히 보이는 사회를 꿈꿉니다.”
철학은 흔히 여유 있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학문,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학문으로 치부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철학에 어떠한 경계선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긴다. 어떤 학문이든 특정 계층에 한해서만 접근이 쉬운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기가오리는 누구라도 철학에 관심만 가지고 있다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려 한다.
철학은 현실과 먼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세계를 설명하고 규명하는 학문이다.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개인이 겪고 있는 문제에서 나아가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 곁에는 전기가오리뿐만이 아니라 교양이나 전공과목 등 철학을 경험할 창구는 충분히 많다. 학문적인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어떤 경로든 망설이지 말고 선을 넘어보는 건 어떨까.
<각주>
1) 통 밖의 외부세계에 대한 믿음이 전부 가짜일 가능성을 피력하는 회의주의 사고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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