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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부러진 화살』, 2009, 후마니타스
한광희 컴퓨터정보공학부 07
‘법 고의로 무시하는 판사들만큼 무서운 범죄자는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이 글은 내가 중앙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었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글자이다. 처음에는 무슨소린가 하고 보았지만, 이내 진지하게 이 책에 빠져들 수 밖에 없어버렸다.
내가 이 사건을 처음 접한 건 2007년 1월, 뉴스를 보다가 판사의 재판에 불만을 품은 피고인이 직접 집으로 찾아가 석궁을 들고 판사를 쏘았다는 게 그때의 사건이었다. 뉴스를 접했을때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2009년에 이 책이 발간되고 도서관에서 책을 집고 이내 그 사건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건을 간단히 요약 하자면, 석궁을 쏜 것은 성균관대학의 이과대학 조교수였던 김명호 교수와 김명호 교수의 교수지위 확인소송을 맡았던 박홍우 판사가 이른바 ‘석궁사건’의 인물들이다. 김명호 교수는 박홍우 판사에 대해 재판과정에서 법대로 재판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피켓시위를 벌였다. 그러던중 2007년 1월 15일 오전 김명호 교수는 자신이 재판에서 패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후에 박홍우 판사에게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박홍우판사와 김명호 교수가 만난 후 석궁은 발사되었고 , 박홍우 판사는 좌측복벽 좌상 길이 2센티미터, 깊이 1.5센티미터의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 사건에서 피의자와 피해자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고, 일치되는 부분도 있지만 사건을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이 ‘석궁사건’을 계기로 김명호 교수는 다시금 재판을 받게 된다. 그 후 김명호 교수와 사법부와의 대립은 사람들의 관심속에 최고조의 양상을 띄게 된다.
분명 이 사건은 단지 교수가 재판에 불만을 품고 ‘석궁’으로 판사를 쏜 것도 역시 관심을 모았지만, 이 사건이 더 큰 관심을 받게된건 재판에 대한 김명호 교수의 태도와 판사와의 대립이었다. 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중에는 판사에게 계란을 던지거나, 욕을하여 퇴장을 당하기도 하고, 화살을 맞은 박홍우 판사보다 김명호 교수에게 여론이 기울기까지 하였다. 어째서 사람들은 화살을 맞은 피해자보다 화살을 쏜 피의자를 이해하려 한걸까? 그리고 김명호 교수는 어떠한 생각으로 재판에 임한 것일까?
‘내가 있는 동안만 해도 강간 치사한 사람이 집행유예로 나갔어요. 강간 치사는 살인만 안 했을 뿐이지 살인하고 같은거야. 그 사람 나갔어. 이게 말이 됩니까. 여기 온 사람들,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한마디 말도 못해. 그걸 거부했을 때는 괘씸죄에 걸려서 없는 죄도 지었다고 인정해야 적게 형 때려.“너 이런이런 죄 있지?”하고 검찰이 윽박지르면, 항변 못해. 제멋대로 구형을 때려 버리면. 우리나라 큰 문제가 검·경찰의 협박성, 윽박지름에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인정해야 판사도 좋게 봐서 온정주의 판결을 내린다는 거. 그게 큰 문제에요. 지금 세간 사람들이 나에게 “왜 재판장에게 대드냐?”고 하는데, 난 이런 사법부 행태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 보고 싶어.’
김명호 교수는 필자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문제를 법전대로 풀고 싶지, 판사에게 선처를 구할 의사는 전혀 없다고 분명히 해두었다. 실제로 김명호 교수는 법전을 공부하고 자신의 재판에서 법전을 조목조목 따져 판사와 대립하였다고 한다.
‘석궁 사건’으로 2007년 2월8일 김명호 교수는 기소 되었고, 같은 해 10월 15일 4년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2008년 2월 1일 서울 동부지방법원 석궁 사건 항소 기각, 2008년 6월 12일 대법원 석궁 사건 상고기각 후 결국 현재 의정부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결국에는 김명호 교수는 사법부에 패한것일까? 그가 쏜 화살은 사법부에 도달하지 못한 걸까? 차후에도 사법부에 개인이 도전하는 일은 있을수도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몇가지 의문이 들었다.
1) 우리는 재판을 집행하는 판사에게 선입견과 그 외의 개인적인 감정과 사고를 배제하고 피해자와 피의자의 상황을 모두 객관적으로 들어주고, 판단해줄수 있음을 요구하고 기대할수있을까?
2) 김명호 교수가 이번사건에서 법전에 의하여 근거를 들고 판사와 대립하는 것보다, 판사에게 선처를 호소하였다면 더 낮은 형벌을 받았을까?
3) 판사에 대한 불신은 있지만, 힘과 지식이 없기에, 재판에 앞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판사앞에서 선처를 호소하는 일이 많지 않을까?
물론 이런 의문들은 답이 있을수도, 없을수도 있다. 이 질문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사법부를 향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고, 우리가 과연 김명호 교수와 같은 입장에 놓였었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 생각해 보는건 어떨까?
‘내가 지각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융통성이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정당하게 내세울수 잇는 권리를 우리가 제한하고 있을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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