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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페미니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펭귄프로젝트72호/가톨릭대와 대학 2018. 5. 31. 09:58
우리에겐 페미니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평등한 대학을 만들기 위한 펭귄들의 멀리뛰기-
'펭귄프로젝트'
신학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대학들에서 미투 폭로가 이어 지고 있습니다. 저명한 교수들의 수많은 성폭력, 성추행 사실 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진상조사와 해임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대학가에서는 미투운동 이후에도 침묵 이 이어지고 있고, 진상조사나 해임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대학들에서도 은폐된 성폭력 사건, 해결을 가로막는 구조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대학 내 미투’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대학에서의 성폭력 폭로는 언제나 끊이지 않았고, 성평등한 대학을 위한 노력 또한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대학은 성폭력의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이 존재합니다. 교수의 권위를 이용한 성폭력과 성희롱 발언들, 술자리에서 벌어 지는 성추행들, 단톡방 성희롱, 화장실 몰카 등.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성폭력이 대학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미투’라는 국면을 통해 대학 내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으로 가 시화 되었고, 앞으로 대학이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미투를 외치는 용기있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고무적이지만, 피해자가 자신의 신변위협에도 불구하고 직접 폭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매우 참담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진짜 피해자’의 ‘진짜 피해’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피해자를 고정적인 피해자의 모습으로 머물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켜 피해자를 고립시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폭로된 사실’ 그 자체와 ‘가해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얼마나 괴물같은 가해자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고 그 가해자를 공동체에서 떼어내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성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대학은 몇몇의 가해자를 처벌하고 징계하고 퇴출시킴으로서 안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를 가능케 했던 대학사회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피해자의 고발과 폭로로써 이어지는 ‘미투운동’은, 이제 가해자와 피해사실 그 자체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닌 공동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확장되어야합니다. 성폭력을 사회적인 일로 인식하고, 성폭력이 용인 될 수밖에 없었던 공동체 내부 문화를 성찰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문화를 고민하고 변화시키겠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지난한 일입니다. 가해자의 처벌을 넘어서서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 조직문화 등을 새로이 재편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에서 어떤 행위들을 성폭력으로 규정할 것인지, 성폭력 피해가 발생한 이후 피해자가 공동체 내부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떤 안전장치를 마련할지, 구성원 간의 평등한 관계를 어떻게 재편할지 등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써 사고되고 해결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치열한 토론을 통합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대학사회의 신자유주의화로 인해 사실상 대학은 예전과 달리 공통의 지향성을 갖고 있는 공동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대학에 남아있는 공동체성은 마초적인 권위주의 문화로 채워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이 과연 가능한지, 성폭력은 공동체적으로 해결한다 해도 가해자가 공동체를 떠나면 그만이 아닌지, 많은 의구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매우 보수적인 판결을 내리고 있는 사법체계 내에서는 다룰 수 없는 성폭력들을 사법부와는 다른 기준과 관점으로 공동체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은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법부는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강간이 인정되는 ‘최협의설’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는 증거가 충분치 않으면 강간이 성립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대학 내부에서 성폭력 사건을 ‘최협의설’과 ‘증거주의’가 아닌 피해자 관점으로 해석하고 공동체의 가치에 부합하게 해결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의 생존과 치유, 그리고 한국사회 전반적인 성폭력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자신이 속해있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부터 다양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경험들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오래전부터 대학 내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을 가시화하고, 피해자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공간, 안전한 공간으로 대학을 재편 하고자 하는 노력은 존재했습니다. 한국의 대학 내 페미니즘 운동은 진보 학생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민주화와 독재타도라 는 과제를 가지고 있던 학생운동진영에서 여성들은 늘 배제되었 습니다. 이에 대항해 여성운동가들은 여성들만의 독자적인 서클을 구성하며 여학생운동을 진행했습니다.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 이후에는 공인된 체계를 갖춘 대표조직들이 건설됩니다. 고려대, 서울대에 총여학생회가 발족되었고 85년에는 한양대, 서강대에서 총여학생회가 건설되었습니다. 1987년에는 여성들의 지역별 연대체가, 1989년에는 여학생 대표자 협의회가 건설됩니 다. 이러한 학생회들과 학생회연대체들은 ‘여학생’운동의 성격을 띠며 활동을 지속합니다.
총여학생회와 그의 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학 내 여 성운동은 9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새로운 여성주의 이론들과 성정치담론들이 한국사회에서 논의가 되기 시작되었고, 대학 내에서 성폭력 담론의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적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학교 신정휴교수성희롱사건은 90년대 초반 성폭력의 의미를 확장 시키고 처음으로 성희롱사건이 사법부에서 유죄판결이 되었던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한 연세대학교에서는 1995년 성정치 문화제를 전환점으로 대학 내에서는 단순히 여학생이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을 넘어서, 섹슈얼리티, 성정치, 젠더문제 등이 대학 내에서 포괄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장이 열렸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전환점을 마주한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은 다양한 여성주의 자치공동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수직적 이고, 위계적인 문제제기를 받았던 대표체들에 비해 수평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의 새로운 모임들을 조직해나갔습니다. 몇몇 학교에서는 총여학생회가 해소되기도 합니다. 학생회 질서로 포괄되지 않는 급진적인 자치체와 연대체를 구성하고자하는 것 입니다. 당시 형성되었던 자치체들은 성폭력 문제를 전문적으로 해결하고자 만들어지는 성정치위원회, 여성위원회와 같은 특별기구, 학번과 위계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여성학회 및 소모임, 공통의 관심사로 모인 다양한 동아리, 다양한 성정치 담론 들을 나눌 수 있는 온라인상의 공론장 등 다양한 모습으로 구 성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화여대의 ‘들꽃모임’, 서울대 의 ‘관약여성모임’, 페미니스트 계간지 ‘이프’ 등이 있고, ‘학내 성폭력 근절과 여성권 확보를 위한 여성 연대회의’라는 연대체 도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90년대 대학 내 페미니즘 운동은 소위 영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7,80년대부터 이어져 90년대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로 많은 대학들에 총여학생회와 성평 등위원회, 인권위원회 등 자치기구와 다양한 동아리, 학회, 소 모임, 교지들이 만들어졌으나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많은 대학의 반성폭력 자치기구들이 사라집니다. 강렬했던 페미니즘 문화 운동 또한 이전에 비해 사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온라인 상 페미니즘 운동의 확장과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같은 사회적 계기들로 인해 한국사회에 페미니즘이 ‘리부트’되고 있습니다. 근 2-3년간 다시금 대학가에도 페미니즘 운동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역사와 전통이 전승이 되어 활동이 지속되는 단체와 모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들에서는 여성주의 운동 이 단절되었다가 새로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폭력으로 가득 찬 대학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다시 모이게 되어 다양 한 일들을 도모하게 된 일은 너무나도 기쁘고 소중한 일이지만 대학에서 시도되는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들은 거센 백래쉬와 자원부족으로 많은 힘겨움을 겪기도 합니다. 자치기구를 설립 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학우들의 반대로 인해서 설립자체가 무 산되기도 하고, 막상 설립되었을 때 돈과 경험, 역량들은 부족 한데 비해 학내 모든 여성주의 사안을 떠안아야 한다는 막대한 책임이 부여됩니다. 수많은 사건 처리와 학내 인권 이슈 대응 등 과도한 업무를 맡다가 주체들이 지쳐 후대의 활동이 지속되 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자치기구와 모임 등을 구 성할 때에 마주해야 하는 고민들은 학교마다, 과마다 천차만별로 다릅니다. 마치 황무지에서 처음 시작하는, 맨 땅에 헤딩을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페미니즘의 공동 체가필요하고, 공동체의 가치와 방향을 먼저 발 벗고 고민할 주체들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활동에도 계보가 있음을 확인하고, 수많은 역사과 경험들 속에서 현재 고민들의 해답을 찾아 보는 일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펭귄프로젝트는 각자의 대학 들에서 자치공동체를 이루고하는 이들의 고민들을 모아내고,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궁리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보려 합니다. 어느 곳에서든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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