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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는 기초연구 생태계, 개혁이라는 이름의 독약82호(2023)/뫼비우스의 띠 2023. 12. 29. 22:58
전민규 편집장
지난 8월 말, 과학계에는 거대한 폭탄이 떨어졌다. 정부가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에서 국가 연구개발(이하 R&D) 예산이 올해 대비 16% 감축된 것이다. R&D 예산은 당장 결과를 내기 힘든 연구 환경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으로, IMF 때도 삭감된 적 없는 분야였다. R&D 예산이 전년도보다 감소한 것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다. 내년도 전체 정부예산이 올해 대비 2.8%나 증가한 상황이었기에 16%에 달하는 R&D 예산 감축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1
이번 예산 삭감은 윤석열 정부의 정책답게 매우 갑작스럽고 급격한 변화였다. 대상에 따라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70%까지 삭감되었음에도 과학계와의 협의 없이 통보 식으로 전달되었다. 말끝마다 과학을 외치던 윤석열 정부였기 때문에, 파격적인 규모의 삭감을 예상치 못한 과학계의 연구 현장은 커다란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사실 이번 사태는 이전부터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었다. ‘과학기술계를 키우겠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명제를 내세우던 윤석열 대통령이었지만, 정부의 정책은 임기 초부터 과학기술계의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시작은 4대 과학기술원(이하 과기원)이었다. 4대 과기원은 일반 대학들과 다르게 과기부에 소속된 대학들로, 국가적으로 육성하는 최상위권의 연구중심 대학이다. 과학 기술 연구의 최전선이라는 이들의 상징성 때문에 이들에 대한 투자는 곧 미래의 혁신을 위한 투자로 여겨져 왔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카이스트(KAIST)’가 속해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예산 편성이었다. 언급한 대학들은 과학기술 분야 고급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 대학들이기에 교육부과 아닌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가 예산 편성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022년 11월, 정부는 이를 교육부의 산하로 편입하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더 많은 재정지원을 하기 위한 변화라고 설명했지만, 여론과 과학계의 강한 반대가 뒤따랐다. 예산편성의 주체가 과학 분야에 전문화되어있지 않은 교육부이기 때문에, 교육부의 상황에 따라 연구비가 끊길 위험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관심도가 낮은 기초과학 연구의 경우 더 위험하다는 우려가 많았고, 낮은 지지율 속에 여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정부는 결국 이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3 4
느닷없이 일어난 과학계와 정부의 힘겨루기는 대통령실의 입장에서 반갑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는 것에만 집중하는 ‘과학계 카르텔’을 깨버려야 한다는 정부의 인식을 강화시켰다. 지난 6월 28일, 대통령실 영빈관에서 열린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발표에 대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전체 정부 예산에서 R&D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데도 과학계는 다른 부처나 외부 전문기관을 배제하고 자신들끼리만 예산 편성을 좌지우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하며 ‘과학계 카르텔’을 비판했다. 5
무엇을 위한 삭감이었나?
주요 명분은 국가 R&D 예산의 부실한 관리 실태로 추정된다. 한국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실질적인 영업 활동 없이 정부 지원금으로만 연명하는 좀비 기업이 2012~2018년 동안 882곳에 달했다고 밝혔다. 별다른 성과 없이 보조금을 노리는 좀비기업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통령의 설명이다. 4대 과기원을 향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그들이 ‘민간 연구기관과 적극적으로 경쟁하고 실제 기업이나 산업에 도움이 안되는 기술 개발에서는 손을 때야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6
그러나 정부는 주장에 대한 명확한 예시와 기준을 밝히지는 않았다. 불분명한 ‘과학계 카르텔’에 대한 여론과 현장의 거센 반발이 이어지자 대통령은 지난 9월 25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다 지원할 수는 없다”
“내년 정부의 R&D 예산안은 미래성장동력 창출에 필요한 R&D를 제대로 지원하기 위한 구조개혁”
“정부는 민간이 할 수 없는 원천·첨단기술 개발과 미래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기술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국가의 지원은 관련 기업과 연구진이 홀로 설 수 있는 기술 자립력을 갖출 때까지 집중하는 것이 맞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위의 발언에 대해 “예산에 있어 국가와 민간의 영역은 분리돼야 한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했다. 이는 불확실성이 높은 연구 초기 단계나 기업이 나서기 어려운 분야에 국가가 선제적으로 지원하고 어느 정도 기술 자생력을 갖춘 분야는 민간에 맡겨놓아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7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구조 개편을 왜 ‘삭감’을 통해 진행해야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별도의 제도 개선 없이 예산만 삭감하면 당연히 좀비기업의 수는 줄어들겠지만 그만큼 건전한 기업과 단체들도 피해를 입는다. 정부가 불확실성이 높은 연구 초기 단계를 지원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하나, 전체적인 지원 규모가 줄어든 상황에서 성과가 불분명한 연구는 더더욱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카르텔이 아니라 생활비도 안되는 돈을 받으며 연구에 매진하는 이공계 학생들이다. 실제로 내년 정부 예산이 적용될 경우, 카이스트 포함 과기원 소속 학생 연구원 1,182명분의 인건비가 사라진다. 이들보다 인건비가 훨씬 비싼 박사후연구원들의 경우, 벌써부터 정리해고가 진행되고 있다. 8 정부는 이에 대해 향후 지원계획을 늘리고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으나 9, 이것이 당장 예산 부족으로 학교를 떠나야할지도 모르는 연구원들에게 해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0
대통령의 발언과 정책의 진행 방향이 모순되는 것도 문제점이다. 정부는 ‘우수 사업’으로 인정된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다른 비효율적인 사업들과 동일한 수준의 삭감을 일괄적으로 진행했다. 이는 저성과 프로젝트를 걸러내겠다는 정부의 목표와는 반대된다. 11
대통령은 민간이 할 수 없는 원천·첨단기술 개발과 미래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기술개발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반도체, 인공지능, 바이오, 이차전지 등의 분야는 오히려 증액했다. 언급된 분야들은 국내의 대기업들이 이미 상당수 포진해있어 이미 ‘기술 자생력’을 갖춘 지 오래된 기술들이다. 이에 비해 수입이 적어 국가의 지원이 간절한 기초과학의 경우, 저성과 프로젝트에 포함되어 예산이 6.2%나 감소되었다. 12
국회예산정책처는 내년도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삭감 결정에 대해 ‘면밀한 타당성 검토 없이 감액 편성’되었다고 평가하며 ‘비합리적인 예산안 편성은 R&D 관련 정책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저하하고 정책 신뢰도도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중장기적으로 민간의 R&D 투자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과학을 위한 변명
인공지능과 우주 개발 그리고 초전도체에 이르기까지, 과학 관련 이슈는 항상 뜨거운 감자가 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자원 하나 나지 않는 이 작은 나라가 세계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는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준 눈부신 성과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을 내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는 사람들이 알면서도 일부러 무시하는 기본 전제가 깔려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상당한 양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투자 값은 금전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당한 결과를 위한 충분한 시간과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무수한 실패들을 감당해야한다.
우주로 발사체를 보낸 오늘 날의 위대한 성과는 의미 없이 별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평생 닿지도 못할 머나 먼 우주를 알고 싶다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동기가 그 출발점이었다. 지금의 혁신이 수익을 기대할 수 없었던 무수한 저성과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미성숙한 과학기술에 필요한 것은 경쟁과 평가가 아닌 실질적인 배려와 격려다.
- 1. 김진원, 「尹 'R&D 카르텔' 지적에…과기부, 산하기관 예산 최대 70% 깎았다」, 2023.08.11., 한국경제,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4878491?sid=105>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2. 김진원, 「尹 'R&D 카르텔' 지적에…과기부, 산하기관 예산 최대 70% 깎았다」, 2023.08.11., 한국경제,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4878491?sid=105>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3. 이해성, 「과기원 예산 '홀대'…과학계가 뒤집혔다」, 2022.11.11.,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2111139461>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4. 임지연, 「과학계 반발에 과기원 예산 교육부 이전 철회」, 2022.11.14., UNN,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36828>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5. 이종현, 「尹대통령 왜 ‘과학계 카르텔’ 질타했나…시발점은 ‘과기원 예산 이관’ 사태」, 2023.07.03., 조선비즈, <https://n.news.naver.com/article/366/0000913788?sid=105>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6. 이종현, 「尹대통령 왜 ‘과학계 카르텔’ 질타했나…시발점은 ‘과기원 예산 이관’ 사태」, 2023.07.03., 조선비즈, <https://n.news.naver.com/article/366/0000913788?sid=105>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7. 박태인, 「[단독] 尹 "韓대통령 못 만난 정상 너무 많다…외교로 기업 도울 것"」, 2023.09.23., 중앙일보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310746?ntype=RANKING>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8. 김승준, 「[단독]과학기술원 R&D 감소 후폭풍…학생연구원 1182명 인건비 증발」, 2023.10.06., news 1 <https://www.news1.kr/articles/5191525>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9. 김만기, 「'R&D 카르텔' 논란 두달만에 권고사직이 시작됐다」, 2023.09.07., 파이낸셜 뉴스 <https://www.fnnews.com/news/202309070952070279>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10. 우제윤 외 3인, 「尹 “R&D 지원규모 계속 늘릴 것”…부랴부랴 과학기술계 달래기 」, 2023.11.01.,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politics/10863134>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11. 심우일 외 2인, 「'우수 사업' 중 73% 예산 삭감…R&D 성과평가 난맥상」, 2023.10.25., 서울경제 <https://n.news.naver.com/article/011/0004253017?sid=101>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 12. 이인희, 「연구현장 곳곳 R&D 예산 삭감 파장 현실화」, 2023.10.30., 전자신문 <https://m.etnews.com/20230830000142> 마지막 검색일: 2023.1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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