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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과 불편함 사이82호(2023)/뫼비우스의 띠 2023. 12. 29. 22:21
이승연 편집위원
『그런 말은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표지 반팔 티, 결정장애, 암 유발자, 00녀, 여기자, 짱깨, 애완동물, 주린이, 헬린이, 동반 자살, 지방 방송 꺼라, 촌스럽다, 유모차, 학부모, 몰카···
위의 단어들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지만, 결코 익숙해서 안 되는 단어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공통으로 지닌 요소는 ‘혐오와 차별’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는 수많은 단어 중 일부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이는 누군가를 배제하고, 그 배제는 곧 혐오의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주어진 우리 사회’에서 생각보다 혐오와 차별을 허용하는 단어들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필요한 표현이 불필요한 차별을 낳는다.” - 본문 138p 中
성심은 이 책을 읽을 때 각 단어의 어원을 꼼꼼하게 살폈다. 책을 읽을수록 왜 우리가 이러한 단어를 지양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성심처럼 혐오와 차별이 내포된 단어들을 듣는 상대방을 떠올리며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평소에 쉽게 말하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다 따지면 도대체 어떤 말을 쓰라는 거지? 내가 가진 표현의 자유는 누가 보장해 주나?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사실 후자의 경우는 이기적인 발상이다. 화자인 본인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게 익숙하거나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불쾌할 수 있는 청자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화는 혼자서 할 수 없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고, 이들 간의 상호 교류가 있어야만 완성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감정도 전달된다. 즉, 청자를 배려하지 않는 말하기는 대화가 아니다. 단지 화자인 자신이 편해지고자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은 대화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함께 대화하는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기분이 상한다면 그것은 과연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관계가 맞을까. 우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가치를 알아야 하며 익숙함과 과감한 작별을 할 필요가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다양한 이유로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불편함을 절대 외면하지 말고 그대로 직시하여 조금은 불편하기를 바란다. 그 불편한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명 자신의 언어 습관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상처받지 않는 언어, 서로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단어들로 우리 세상이 가득 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지금보다 더 기본값이 되어야 한다. 하루빨리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에서 누구와 어떤 문장으로 대화하든 편안한 시간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아래에는 서두에서 언급한 단어 중 몇 가지만 추려서 책 본문 내용을 삽입했다. 더 많은 단어와 지양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길 바란다.
- 반팔 티 → 반소매 티셔츠 : 소매가 반이지 팔이 반인 것이 아님. 고려대 국문과 신지영 교수는 ‘반팔’이 ‘온팔’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에 주목했음. 이는 정상성에 기초한 소외가 자연스레 차별과 연결된 것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반바지를 보고 반다리라고 하지 않음.
- 결정장애, 선택장애 → 우유부단하다 : 부정적인 상황(결정을 ‘못 하는’ 현상 자체)을 또다시 장애로 표현했다는 점이 중요함.
- 00녀, 여기자 → 기자 : 00녀의 경우 주로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며, 이는 여성 차별일 뿐 아니라 ‘남성이 표준’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것. 그저 직업일 뿐인데, 굳이 앞에 여00을 붙임으로써 한국 사회는 은연중에 여성을 동등한 직업인으로 인정하지 않음.
- ―린이 → ―초보자 : 어린이들이 어른보다 미숙하다는 선입견이 씌워진 표현. 처음 하는 일은 누구나 서툴며, 오히려 어린이들이 처음 시도하는 걸 더 잘 받아들이고 두려움과 편견 없이 도전하는 경향이 있음. 어린이의 특징을 미숙함으로 규정하기엔 어린이들은 꽤 성숙함.
- 유모차 → 유아차 : 수유(乳)와 어머니(母)를 뜻하는 한자로 이루어져 본래의 의미와 거리가 있으며, 평등 육아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지 않는 표현. 이는 2019년 국회에서 발의된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서도 언급됨.
- 학부모 → 보호자, 어른 : 미성년자의 보호자가 반드시 학부모이지는 않음. 이는 ‘정상 가족’ 프레임에서 보호자를 한정한 표현.
- 몰래카메라, 몰카 → 불법 촬영, 디지털 성범죄 : 당사자 동의 없이 촬영하며 반응을 살피는 이벤트나 장난 등을 뜻하며, 이는 유희적 의미를 담고 있어 범죄를 순화시키므로 심각성을 나타내기에 적합하지 않음.
※ 아이폰이나 갤럭시를 사용한다면 텍스트 대치 기능을 활용하여 무의식적으로 쓰는 표현을 바꿔나갈 수 있다. (아이폰: 설정 - 일반 - 키보드 - 텍스트 대치, 갤럭시: 설정 - 일반 - 키보드 설정 - 단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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