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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생명의 가치를 달 수 있는 저울이 있을까요?51호/뫼비우스의 띠 2010. 2. 18. 19:53
최성주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얼마 전 범죄 피의자의 신상공개 문제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한 연쇄살인범이 체포되면서 그가 저지른 끔직한 범죄행위로 온 나라가 뒤숭숭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그가 저지른 새로운 범죄사실이 확인되자 국민들은 분노하고 절망했습니다. 보도를 접하는 많은 사람들은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낀 피의자를 보면서 그렇게 나쁜 짓을 한 범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흉악범의 얼굴을 보면 불쾌감을 넘어 오히려 심리적 불안을 느낄까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범인의 얼굴이 언론에 의해 공개되었습니다. 현행 수사준칙은 피의자인권 및 무죄추정의 원칙 등을 적용하여 수사기간 중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고, 언론윤리강령도 인권침해를 우려해 범죄보도 시 현행범과 공인이 아닐 때 당사자의 동의 없이 피의자를 촬영하거나 사진·영상을 보도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언론사에서 범인의 사진을 찾아내어 공개하자 몇몇 언론사에서 뒤따라 범인의 얼굴을 공개하여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얼굴을 공개한 언론사에서는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라는 주장을 했지만 선정적이라는 비판도 많았습니다.
우리 언론은 어떤 이슈가 나타나면 모든 언론사가 특종을 향한 경쟁을 시작합니다. 좀 더 색다른 뉴스거리를 찾기 위해 직접 관계가 없는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고, 뒷이야기를 들추어내곤 합니다. 사건의 본질 파악과 예방책 등 대안에 대한 고민보다는 사건의 주변을 맴돌며 호기심 충족을 위한 눈요깃감을 찾아내기 위해 분전하는 것이지요. 그로인해 피해자나 피의자의 가족들이 또 다른 언론피해를 당하는 일이 왕왕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는 언론윤리에 비추어 가장 경계해야할 일이지만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1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미네르바라는 젊은이가 체포되었을 때 대부분의 언론에서 보여준 것은 그가 사는 동네, 세 들어 사는 집, 졸업한 학교,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이었습니다. 미네르바 체포의 의미를 분석하기보다 학교성적이 어땠는지, 가게에서 뭘 자주 사는지 알려주고, 동네사진을 찍어 그가 사는 집에 동그라미를 그려주거나 심지어 현관문손잡이를 비틀어 열어보는 카메라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알권리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신정아씨의 알몸사진이 국민적 알권리일까요? 알권리는 국민들이 흥미를 느끼는 눈요깃거리가 아닌, 알아야할 ‘진실’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권력기관이나 재벌의 부패 등에 관련한 문제는 진실의 문제이기에 국민에게 마땅히 공개되어야 하지만 피의자의 얼굴은 사건의 진실과 무관합니다.
일반적으로 알권리는 국민 개인이 정부부처나 공공기관 등이 하고 있는 업무에 관련하여 국민으로서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공무원 등 공기업 종사자는 업무의 공정성, 예산집행의 투명성 등을 담보해야 하며 우리나라도 이를 정보공개법 등의 법률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인 내가 다른 개인인 피의자의 신상정보에 궁금증을 느낀다는 이유로 알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언론이 대리해줄 권리도 없습니다. 물론 범죄행위로 인해 자발적 의지가 없어도 이미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버렸기에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이 곧 알권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또 한 가지 피의자 신상 비공개라는 그동안의 사회적 합의를 깨고 사진을 언론에 노출시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흉악범의 인권은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인권의 영역이 어디까지라고 선을 그어 정의할 수 있나요? 내 인권이 다른 사람의 인권에 비교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근거나, 가치 있는 인권과 가치 없는 인권을 구분하는 기준이 존재할까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인권은 의미가 다를까요? 인권은 선악과 호불호의 문제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으로 절대적 명제입니다.
또한 인권이란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인권이란 상대적 가치이자 약자를 위한 지향적 가치로, 강자가 약자에게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얼마나 보호되고 있는지가 그 나라 민주주의의 척도라고 합니다. 체포, 구금되어 모든 권리를 구속당한 채 처벌을 기다리는 범죄자는 더 이상의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이미 상실한 사회적 약자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피의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피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입니다.
물론 범인에 의해 짓밟힌 피해자의 인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으며 우리는 그것에 분노합니다. 그러나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피해자의 인권이 더 보호되지 않습니다. 이 둘은 별개의 것입니다. 인권은 어느 한쪽이 내려간다고 반대쪽이 올라갈 수 있는 저울과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모든 인권이 보호되어야 하는 절대적 이유는 있지만 인권을 침해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연쇄살인 피의자는 재판절차를 통해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미 1심에서 법정최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사건발생 이후 여론의 동향이 신상정보 공개 등에 관한 기존의 논의와 맥락을 넘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가라앉지 않는 흉악범에 대한 분노가 기존의 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 주장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얼굴공개냐 아니냐를 넘어 사형집행 주장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학문적, 법적, 사회적 논의가 무시되고 언론에 의해 선정적으로 진행되어 사회적 논란을 더 가중시킨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사형이 집행된 이후 지금까지 집행이 정지된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의 지위에 있습니다. 사형제 폐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폭넓게 형성되어 지난 15대 국회부터 18대에 이르기까지 과반이 넘는 국회의원들이 사형폐지특별법안에 서명을 하였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처리가 미뤄지고 있습니다.
사형은 반인권적 형벌이고 생명권에 관한 폭력이며 비록 국가권력이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이 시작됩니다. 과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심을 배경으로 했던 법감정을 넘어 범죄자를 사회에서 격리시키거나 재범방지를 위한 교화의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 현대의 사법체계입니다. 1977년 유엔에서 사형철폐권고안을 결의한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형제를 폐지하고 있고 현재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은 128 개국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형제도가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일으키고 범죄예방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살인 등 강력범들은 우발적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파단하지 못하거나, 계획된 범죄자의 경우 잡히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는 자신은 잡히지 않는다는 확신이 더 크다고 합니다. 실제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흉악범의 숫자가 계속 증가하는 것이 입증되어 사형제를 폐지하고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형제는 오판의 가능성이 단 1%라도 있다면 제고가 필요한 제도입니다. 과거 정치적으로 사형제도가 악용된 경우처럼 몇 십 년이 흐른 후 무죄가 확정되어도 이미 집행된 사형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던 얼마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윤리강령 및 신문윤리실천요강을 발표했습니다. 형사피의자나 참고인, 증인의 사진을 촬영하거나 사진·영상을 보도할 때에는 ‘공익’과 ‘공공성’을 고려하되 얼굴 공개여부는 언론사 자체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각 언론사가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으로 마음대로 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언론윤리강령은 자율적 규제이긴 하나 언론보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엄격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에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새 윤리강령은 현행 방송심의규정에도 위배되는 내용으로 개별 언론사의 판단에 의한 보도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기에 인권적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후퇴한 윤리강령입니다.
범죄보도에서 유의해야할 점은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르는 선의의 피해자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와 대안 마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공개냐 반대냐의 문제를 넘어 인권 등 우리사회의 가치에 대한 문제입니다. 많은 이들이 흉악범의 얼굴공개에 찬성하지만 다수가 원하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기에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이분법적 논란을 넘어 우리나라에서 인권이나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깊은 논의가 부족했던 점을 인지하고 그 절차와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장을 열어주는 몫이 오히려 언론에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적 합의를 모아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협의의 과정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어떤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거나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향은 개선되어야 할 언론의 과제입니다.
또한 아직 우리나라는 프라이버시권이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어있지 않아 인터넷 강국이라면서도 인터넷상의 인권침해 문제 또한 심각합니다. 어떤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인터넷을 통해 실명이나 사진이 공개되고 나이, 집주소를 비롯해 학교나 직장,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노출되는 일 등 인권침해요소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제도적인 준비와 사회문화적인 고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피의자 신상정보에 관한 명확한 기준이 없이 매번 유사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부분적인 지적에 머물러 있던 범죄보도의 문제를 사회전반적인 문제의식으로 넓혀서 재조명해 보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피의자 신상공개가 범죄예방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언론기사의 주 내용은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시민반응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더 많기에 그 진정성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회적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보다는 일방적인 편 가르기의 주장이 많습니다. 언론이 일회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이 증가하는 문제를 진단하고 그 예방책을 논의의 테이블로 이끌어 내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언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이유입니다.
더구나 얼마 전 법제처에서 피의자 신상공개에 관한 수사준칙을 개정하겠다고 공표하였습니다. 현행보다 얼굴공개가 확대된 방향으로 개정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국민적 분노만을 수용한 일방적이고 성급한 결과입니다. 이 또한 감정논리에 휩쓸리지 않는 보다 근본적 대안모색을 위한 공개적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결과 위에 사회적인 협의를 위한 절차와 방식이 필요합니다. 현재 성범죄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범위와 제도를 통해 정보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숱한 찬반 토론과 사회적 논의가 있었고 이제 겨우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피의자 얼굴공개에 관해서도 성범죄자 문제처럼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합니다. 현재와 같이 언론에서 문제를 터뜨리고 정부나 경찰에서 일방적으로 대안을 마련하는 방식이 아니라 법조계와 언론계,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폭넓게 참여 하는 공개적인 논의구조에서 공동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절차도 없이 언론의 부추김에, 사회적인 감정에 밀려 당국이 자의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선의의 피해자를 막으려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라지 않는 것이 형사법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경찰서 문을 나오는 순간 한 피해자의 어머니가 범인에게 달려들다 수사관의 강한 제지로 나뒹굴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피해자의 아픔보다 범인보호가 우선이냐는 또 다른 논란이 일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국내 언론사 카메라가 모두 입구의 범인을 찍고 있을 때 일본 후지TV의 카메라는 처음부터 그 어머니를 향해있어 출발부터 쓰러지기까지 모든 장면을 생생하게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특종(?)의 이면에는 피해자 가족에게 기자회견장에서 유영철의 모자를 벗기면 사례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후지TV의 연출이 있었다고 합니다. 극단적 경우이긴 하지만 언론의 선정적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한 언론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자사의 이익에 따라, 사안에 따라 다른 상황논리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 한결같은 언론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언론의 품격이 우리 국민의 품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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