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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민주주의 ― 선거는 우리를 주인으로 만드는가51호/뫼비우스의 띠 2010. 2. 18. 19:56
편집위원 Blackflag
민주주의의 위기?
“영국인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지만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의회구성원의 선거 시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구성원이 선출되자마자 인민은 노예화된다. 그들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 장 자크 루소
2009년 4월 8일, 이날 수업이 끝난 뒤. 나는 평소 수요일 마다 했던 일들을 제쳐두고 집으로 가야했다. 6시가 다되어 집에 도착한 나는 신분증을 챙겨 근처의 초등학교로 향했다. 경기도교육감선거가 있는 날. 투표하는 사람보다 참관인이 더 많았던 한 교실에서 나는 ‘나의 주권’을 던졌고,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나의 주권을 행사했다는 뿌듯함 보다 깊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내가 뽑은 후보가 당선이 되든 안되든, 그닥 많은 것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늘 투표가 왠지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음날 확인할 수 있었던 경기도교육감선거의 투표율은 12.3%였다. 이런 낮은 수치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의 선거에서 투표율이 점차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75.8%였던 투표율은, 제14대 71.9%, 제15대 63.9%, 제16대 57.2%, 제17대 60.6%(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당시 대통력 탄핵사건이 변수로 작용해 높은 투표율이 나왔다 볼 수 있다.), 현 국회의원을 뽑았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46.1%로 점차 낮아져만 갔고, 대통령선거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투표율 89.2%에서, 제14대 81.9%, 제15대 80.7%, 제16대 70.8%, 그리고 현 대통령이 선출된 제17대 대통령선거는 63.0%까지 떨어지기에 이르렀다.
어떤 정치학자는 이러한 투표율의 저하가 ‘선거의 절차적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더불어 ‘젊은 세대들이 투표하지 않는 것이 한국민주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고 까지 했다. 1
무력감의 문제
“민주주의에서 당신은 가난해도 존중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는 말라.”
- 찰스 메릴 스미스
나는 그동안 지방자치단체 선거,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까지 총 3번의 선거를 경험했다. 마땅히 찍을 후보가 없었던 대부분 선거에서 나는 확실하지 않은 후보를 선택할 수도, 그렇다고 아무도 찍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지만, 결국 아무도 찍지 못했다. 누구를 찍은들 크게 변화가 없을 것만 같았고, 내 투표가 많은 것을 바꾸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1987년 6월의 항쟁이 신군부의 독재를 밀어내고, 국민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어 냈을 때 항쟁의 주인공들은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항쟁의 결과로 얻은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다름 아닌 신군부의 노태우였다. 직선제만 이룩하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일 것이다. 1987년 우리의 선배들이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민주주의. 그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민(民)이 주인되는 체재를 뜻하며 그리스어로는 인민의 힘, 즉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뜻이었다. 스스로 ‘보통 사람’이라 칭했던 민정당(신군부)의 노태우가 진정 보통 사람이며, ‘민(民)’이었을까. 애초에 시작부터 그 한계를 드러냈던 선거는 이후로도 시민들에게 점점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내가 선거에 참여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은 선거를 거치면서 점점 심해져 갔고, 이러한 무력감이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주인들이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현실을 진정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그리스의 민주주의
“자유의 한 형태는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역사상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때는 현재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Democracy의 어원이 나온 그리스에서, 그 중에서도 아테네라고 하는 도시국가에서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던 민주주의를 현대의 대의민주주의와 구별해 ‘직접민주주의’라 부른다. 당시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시민그리스의 시민 계급에는 일정 나이 이상의 남성 자유민을 뜻했다. 여성과 외국인,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을 담당했던 노예는 시민이 되지 못했고, 따라서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의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한 민회에서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해결해갔다. 하지만 이러한 민회에서 모든 일을 다루고 해결할 수 없기에 많은 일들을 일부의 시민들에게 위임하여 해결하였다. 위임할 사람을 뽑는 방법은 지금처럼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첨’, 즉 ‘제비뽑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금의 생각으로 추첨에 대해 생각하면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제도를 통해 민주주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먼저 후보로 지원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심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에 추첨이 이루어졌다. 추첨을 통해 행정관이 된 사람은 민회와 법정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고, 시민이라면 누구든 행정관의 탄핵을 요구할 수 있었으며, 소송에서 패한다면 처벌을 받아야 했다. 더불어 이러한 행정관은 재임이 불가했다다만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관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고, 재임에도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도 민회와 법정의 감시를 받았고, 탄핵될 수 있었고, 이에 따른 책임을 져야만 했다.. 행정관은 민회와 법정이 내린 정치적 결정을 집행하는 집행자이자 관리자일 뿐이었다. 여기에 더불어 시민 법정이 있었다. 역시 지원자 중 추첨을 통해 선출되었으며, 개인간의 분쟁이나 형사사건 외에도, 기존 법의 위법성을 심사하는 비합법성 기소라는 제도가 있었다. 모든 시민은 민회에서 만들어진 법에 대해 비합법성 기소를 할 수 있었고, 법정에서 위법함이 판결이 나면 그 법을 제안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이러한 시민 법정의 기능은 민회의 활동의 통제를 가할 수 있었다.
이렇듯 아테네에서는 모든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며, 권력의 일부가 다른 기관에 위임되었다. 하지만 위임의 과정이 추첨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추첨의 맹점인 무능한 사람에 의한 통치를 막기 위해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고, 재임이 불가능하였다. 또한 시민들의 비합법성 기소에 대해 책임을 져야 스스로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공직에 나설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추첨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겸손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자신이 잘나서 선출된 것이 아니므로), 통치자는 임기가 끝나면 다시 피통차자로 돌아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구조였다. 이 제도가 민주주의라 불리울 수 있는 이유는 시민이라면 누구든 참여할 기회를 보장받았고, 그 회원이 지속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통치자와 피통치차가 빈번하게 상호 교환되었다. 특출난 사람에 의한 지배가 아닌 자신과 같은 위치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민주주의 = 선거?
“민중의 대표들에 의해 선언된 민중의 목소리가 동일한 목적을 위해 소집된 민중 스스로의 선언보다는 공공선에 더욱 부합할 것이다.”
- 제임스 매디슨
그렇다면 언제부터 선거가 ‘민주주의’라 불리게 되었을까. 현대의 정치체제의 기초가 되었던 프랑스혁명과 미국 독립 때 까지만 하더라도 ‘선거를 통한 공화정’가 주장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참여’의 문제는 ‘동의’의 문제로 바뀌어 버렸다. 문제 해결에 직접 참여하는 기회를 얻는 그리스의 형태에서 문제를 해결 해줄 대표자를 뽑는 형태(대표자에게 정당성을 주는)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대의제나 공화정이라 불리던 정치형태는 이후 (민중의 요구에 의한)선거권의 확대를 통해 대의‘민주주의’로 이름을 바꿔달게 된다. 여기에 미-소간의 냉전구도는 ‘프롤레탈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정치형태를 ‘민주주의’라 주장하는 이유가 되었다. 물론 현실사회주의국가의 사회보다는 ‘민주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민주적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자연적으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인민의 지배’를 뜻하며, 앞서 보았던 그리스의 경우처럼 추첨과 같은 제도를 통해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림 받는 사람이 동질성을 가지고 번갈아가며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선거를 통한 대표의 선출은 피통치자들과는 ‘다른’,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을 통치자로 선택하는 것이다. 대의제의 기초를 만든 사상가들도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고 민주주의보다 우수한 정치체제라 생각했기에, ‘선택된 시민 집단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 대중의 견해가 정제되고 확대되’고 ‘통치를 어떤 특별한 전문적 직업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2고 주장했다. 선거는 이처럼 선출된 사람이 그들을 선출한 사람 사이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통치자-피통치자가 동일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선거는 민주정보다 귀족정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3
물론 선거권이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고, 이런 시민들이 선거에 출마하는데 법적 제한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민주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에 나가는 그 후보자들은 각각 다른 인지도를 가지며, 이미 유명하거나 정치적으로 발언력이 있는 사람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또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어 사실상 부유한 계층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한다. 그리스의 경우처럼 평범한 시민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점에서 대의제는 민주적이지 못한 부분을 포함한다.
더욱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는, 단순한 ‘대리자’의 역할을 넘어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판단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심부름센터 직원처럼 내가 하고자하는 일을 ‘그대로’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닌, 마치 펀드매니저처럼 수익을 위해 대신 투자해주고 결정 해주는 역할인 것이다. 펀드매니저가 고객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이 같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고객의 이익과 자신(또는 회사)의 이익을 선택하여야 할 때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익을 선택하듯, 대표자도 그를 뽑아준 시민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이 다를 때는 자신의 이익을 선택할 것이다.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고, 이기심과 경쟁을 원동력을 삼는 경제체제 아래에서 선거를 통해 뽑힌 대표자라 해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공공선’을 선택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선거를 통한 대표자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절대 해약할 수 없는 펀드계약과 같다. 아무리 큰 손해를 봐도 더 큰 손해를 감수해야만 해약할 수 있던 펀드처럼.선거를 넘어선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갖는 문제에 대한 처방은 더 큰 민주주의다”
- 존 듀이
선거는 ‘민주적’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인 것은 아니다. 현재보다 더 제한이 많았고, 더 귀족적이던 초기의 선거를 조금이나마 더 ‘민주적’으로 만들어간 것을 시민들의 힘과 참여였다. 대단히도 제한적이었던 한국의 대통령선거를 보다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 직선제로 바꾼 것은,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저항이었다. 이들이 선거를 더욱 ‘민주적’으로 만들어 갔던 과정이었다. 하지만 직선제만으로는 선거의 민주적이지 못한 부분을 뛰어넘지 못했고, 그 이후로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처럼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선거제도가 가지는 한계가 더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고, 위기인 상황이다.
다시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되돌아보자. 그 당시의 제도였던 추첨은 현대에 있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서구에서는 ‘배심·참심’제도를 통해 활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배심원 제도가 만들어졌다.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원은 평범한 시민들 중 ‘추첨’을 통해서 뽑아지는 제도이다. 얼마 전 진보신당에서는 정당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의원 중 일부를 평범한 당원 중에 추첨을 통해 선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당내 선거와 당비 납부에만 참여하던 소극적인 당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정당운영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애초에 ‘선거’라는 제도를 선택했을 때 단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추첨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배심원 제도는 당장에라도 ‘추첨’이 의사결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물론 지금 당장 아테네처럼 모든 관직을 추첨을 통해 뽑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배심원 제도가 가지는 역할처럼, 평범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해 조금이나마 고쳐나가는 과정이 정치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이와 더불어 그리스에서 모든 시민들이 비합법성 기소를 통해 통치자를 견제하였던 것처럼, 시민들이 직접적으로 통치자를 견제하고,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 국민소환제도와 국민발의제도가 있다. 이미 지방자치의 경우 주민소환제도와 주민발의제도를 통해 직접적으로 대표자를 감시하고 정치적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경기도 하남에서는 주민들의 의견에 반하는 광역화장장을 유치하려한 시장과 시의원을 소환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고, 그 결과로 시의원 2명은 소환되어 시의원 자격을 잃게 되었다. 또한 몇몇 지자체에서 주민발안제를 통해 학교급식조례를 만들어 그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로 급식을 제공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참여해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선거속에서 느끼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시민이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와중에 무력감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동일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도 좀 더 다가가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민주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진정 우리 스스로 주인되는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작은 곳에서부터 참여하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더 큰 민주주의’는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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