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화된 자아, 페르소나51호/가대人 2010. 2. 18. 19:30
김유리 중국언어문화전공 07
“인간의 존재는 너무 복잡해서 하나의 얼굴만으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존재의 본질로 삼아야 하는가?”
인간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 고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
지 않게 웃고 떠들다가도 혼자만의 시간에서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어떤 관계에서는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야 하고, 또 다른 관계에서는 활발하고 유쾌해야 한다. 가족 앞에서의 나, 친구 앞에서의 나, 선생 혹은 직장 상사 앞에서의 나 등 특정 관계 속에서 그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쓴다. 타인의 기대에 자신의 개인적 이상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이 가면은 사회적 자아인 페르소나다.
모든 인간, 적어도 문명화된 사회 속 인간이라면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페르소나 안에는 이기적이며 충동적 자아인 에고가 있다. 에고는 본능적이며 욕구 앞에서 순수하다. 따라서 겸양과 아량이 중시되는 인간관계, 법과 도덕으로 질서를 삼는 현대 사회에서 에고는 통제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이고 냉철한 자아인 페르소나를 내세운다. 페르소나는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우선시하는 타자 지향적 사고를 하고 스스로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 내면에는 서로 대립되는 성향의 페르소나와 에고가 공존하고 있다.
인간은 페르소나와 에고의 괴리감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 자유를 박탈당한 에고와 강압적 통치자인 페르소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많은 페르소나 중 무엇이 진짜인지, 페르소나와 에고 사이의 타협점은 없는지에 대해 고뇌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장자는 ‘오상아(吾喪我)’를 제시한다. 즉 ‘나를 잃어버려라’는 것이다. ‘나’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존재이므로 어느 것에도 얽매이거나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에 의해 설계된 페르소나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 장자는 이러한 ‘나’에 대한 집착이 갈등과 번뇌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갈등을 오상아를 통해 해결하라는 장자의 말은 ‘나’의 가변성을 근거로 한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의 모습은 각각 다르다. 이렇게 변화하는 자신을 관통하는 고정 불변의 원형은 없다. 그저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 속 흘러가는 의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잠시 머무를 수는 있어도 정착할 수는 없다. 의식의 흐름 속 순간적이며 상대적 자아가 있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자신을 정형화하여 그 안에 가두려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러므로 고집하는 내 모습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나를 잃어버려라’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특정한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화(化)의 흐름 속에서 노니는 무아(無我)의 상태, ‘오상아(吾喪我)’다.
이제 서두에 제시한 질문에 답을 내려 보자. 어떤 ‘경향’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의 본질로 삼아야 하는 ‘정형’은 없다. 본질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고정화된 유형에 맞추어 간다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 본질을 추구하려 함으로써 가변적 자아를 정형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페르소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유로운 자아를 추구해야 한다. 작위적(作爲的) 자아를 버리고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선(善)의 인간상이다. 자아를 의식적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은 ‘나’를 해(害)하는 것이다. 오렌지에 손을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51호 > 가대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을 만나다 (0) 2010.02.18 더 이상 방황으로의 방향은 없다 (0) 2010.02.18 #1.어버이날 전날밤 (0) 2010.02.18 런던에서의 2박 3일 체류기 (0) 2010.02.18 「88만원세대」-우석훈 (0) 2010.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