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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의 언론과 소통52.5호/N201 2010. 2. 26. 19:03
편집위원 박진홍
누리꾼들에게 블로그·트위터는 생활의 일부로 다가와 있다. 누리집에 사진을 포스팅하고, 이웃들과 게시물과 리플을 올리며 소통하는 블로그 혹은 트위터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내 생각이나 신변잡기 등 모든 것들을 불특정 공중과 대화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여러분들의 조그만 누리집은 소통의 장, 다시말해 ‘1인 미디어’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촛불세대로 불리는 여러분과 ‘소통이란 무엇이고 대학언론의 정체는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을 나눠보고 싶다.
통하였느냐?
2010학년도 수시2-1 전형에 합격해 정시생보다 앞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던 학생들은 뜬금없는 GEO
GEO : Global English Outreach. 우편물을 받았을 것이다. GEO는 박영식 총장이 학교발전 기조로 글로벌 인바운드를 내걸고 추진한 영어실력향상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첫 삽부터 심상찮은 기류가 흐른다. 3년 이상 달려와 대학생활의 차비를 하는 숨고르기 단계에서 느낀 적잖은 당황스러움, 부모님이 우편물을 먼저 ‘득템’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겨 등떠밀려 지원서를 써야 하는 불상사,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분반을 연상케하는 레벨테스트란 악조건은 차치해 두자. 그러나 이면의 학교당국의 일방적 통보, 의무수강인지에 대한 여부, 방 배정 방식을 선착순으로 하겠다며 공지했으나 실지론 가나다순으로 잘라 배치한 주먹구구식 행정, 오락가락하는 해명은 학생과의 불통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작년에만 해도 성심교정의 명칭변경, IH(International Hub)관 운영계획, 국제화 기조를 둘러싸고 학교와 총학생회간 입장 차이가 커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으나 종국 양측의 이견만을 확인했을 뿐, 제대로 된 소통과 이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현안들은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오비이락인지 이런 독단과 아집, 불통은 4대강 사업과 세종시 원안 파기의 형세와 너무도 닮은꼴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가톨릭대, 더 나아가 사회를 불통의 늪으로 밀어넣고 있고, 역으로 어떤 수단으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히든카드는 무엇인가? 필자는 ‘대학언론’이란 유일무이한 카드를 제시한다.
여기서 잠시, 앞서 본 <가톨릭대의 A>를 상기해보자. 등록금·취업·스펙경쟁에 경도된 무거운 캠퍼스 분위기는 사회와 분리해 설명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단례로도 비정규직과 노동유연화로 말미암은 스펙쌓기 경쟁, 고등교육 문제, 사회적 양극화는 대학생들에게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여진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위에서 언급한 수두룩한 문제에서 볼 수 있듯 대학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현안들의 근원을 찾아 내려가다보면 그 끝엔 사회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있자면 대학사회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까지 발견할 수 있다. 대학은 사회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축소판이라고 하지 않던가. 굳이 사회와의 차이점을 꼽자면 구성원의 제도권 교육정책에 의한 균일화, 사회 크기같이 부차적인 것들일 뿐이지 조직의 주인이며 그 안에서 여론을 형성·발전시키는 주체가 학생이란 점은 명확하다. 이제 이런 동의를 바탕으로 대학언론 존재의 당위성을 모색할 수 있다. 앞서 학생 대다수가 불합리함을 지적한 GEO문제와 같은 학교행정의 문제를 비롯해 학내 구성원들간의 갈등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학내 소식통은 가톨릭대에도 존재한다. 이해를 돕자면 중·고등학교시절 CA·HR 자율활동 식으로 운영되온 교지·방송반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나 대학의 그것은 존립근거, 제반환경, 운영상에서 상이한 면을 띠고 있다. 가톨릭대 성심교정에는
, <가톨릭대학보>, <영자신문사>, <가대야>, 지금 여러분이 펼쳐보고 있는 교지 <성심>이 학내 언론으로서 각자 맡은 자리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러분이 언론사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각각 방송·신문 등 저마다의 필설을 매개로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으나 매체들의 역량과 노력 여하 그리고 학내 분위기에 따라 소통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새내기 여러분들이 갓 입학한 상황에서 어떻게 학내 언론을 이해할 지는 미지수지만 3월 개강과 동시에 방송국·학보·교지를 접하면서 학내외의 정보를 얻고 각 매체마다 상이한 보도논조를 비교하기 보단 ‘가좋사’나 ‘가대인’, ‘디시인사이드_가톨릭대갤’을 통해 수업정보, 사적인 고민을 공유하는 누리집 커뮤니티에 더 관심을 둘 것인지, 또 소통 통로를 누리집들에 방점을 둘 것인지에 대한 우려는 교내 언론인들의 관심사다. 여러분이 대학 언론들의 생리와 역할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조력하기 위해 교지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해 볼 것이다. 미처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새내기 대학생으로서 교양을 쌓는다는 편한 마음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산이거나 컵라면 덮개이거나
지금 여러분이 쥐고 계신 ‘교지’는 방송국의 시나리오, 학보, 대학내일과 같은 언론과는 지향점과 말하고자 하는 바에 있어 약간의 차이점을 띤다. 일반적으로 이 모두를 대학언론이라 지칭하기는 하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대학문화가 한데 어울린 독특함은 특히교지에서 맛볼 수 있다. 대학언론이란 근본적으로 저널리즘 태도를 견지하는 동시에, 대학의 특수한 문화·실험정신이 핵심 요체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 두 조건을 가능케하는 제반조건의 알맹이는 무엇일가? 근래 기성미디어 일각에서 강조하고 있는 ‘독립성’이 그것이다. 교지는 학보와 방송국과는 달리 자치언론 타이틀을 가진 매체이다. 편집위원의 논고에 학교나 사회에 불편부당할만한 내막이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편집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돈줄을 끊어 압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한 구조적 독립성은 권력이나 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언론 본연의 조건이다. 따라서 교지는 자연스럽게 학교나 사회에 가감없이 비판하고 견제하는 와치독(Wacth Dog)
본래 '집이나 재산을 지키는 개' 따위로 쓰이나 본문에서의 와치독은 권력과 자본을 감시·비판하는 언론의 자세를 일컬음.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실제로 권위·군사주의 시절 대다수 기성언론들이 함구할 때 대학언론이 ‘할 말을 하는’ 미디어 기능을 하여 민주화운동에 숨은 일꾼으로 수임해 왔음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타 매체들의 환경은 할 말 하는 언론의 필요조건을 충족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학보를 예로 들자면, 학보는 학교예산으로 발행되며 총장을 대리한 교수가 학보 발간에서 독점적 전권을 가지고 있는 형편이다. <가톨릭대학보>는 다행히 학교비판·여론추합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으나 최근 타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내언론 길들이기 사례들은 언론존폐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새내기 여러분들 중 대학생인 형제·자매를 통해 <대학내일>이나 <카미>(캠퍼스헤럴드)를 접해본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건성으로 몇 장을 넘겨봐도 알 수 있듯, 기업광고, 쿠폰, 공모전, 채용공고 등 구미가 당길만한 콘텐츠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대학생을 타겟으로한 전국구 잡지를 진정한 대학언론으로 볼 수 있을까? 광고수입으로 발간하는 상업 대학매체가 냉철한 시각으로 광고주·대학의 부조리를 고발 할 수 있을지는 명약관화다. 또 얼마나 학내 소식을 발빠르게 전할지, 여론을 모으고 학생권익을 주장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교지를 비롯해 대학언론을 상업지와 비교해 본다면 여론다양성과 색다른 시각을 지향한다는 걸 한눈에 느낄 수 있다. 대학언론의 젊고 실험적 시각을 바탕으로 통념 이면을 직시하는 신선한 접근도 주목받고 있다. 즉, 대안적 의미에서 대학언론은 대학 내 여론을 모으고 소통시키는 장을 학생의 눈높이에서 열겠다는 것과 다름아니다.
이제 초점을 안쪽으로 돌려보자. 어쩌다 88만원세대로 일컬어지는 20대에게 대학언론의 위치는 어떠한가. 생경한 얘기일 수도 있으니 사례를 통해 대학언론의 오늘을 조명해본다. 2006년 <동덕여대학보>는 총장을 비판한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담당 주간교수와 기자 16명이 전원 해임됐다. 08년엔 <울산대신문>이 총학생회에 의해 강제 수거되었으며 <명지대신문>은 학교비판 기사가 다 편집되 한 면이 백지로 발행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다. 학보사 수습기자 지원시 아예 일괄적으로 ‘학교와 관련된 민감한 보도를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각서까지 강요받는 곳이 있다. 공간의 부족으로 일일이 나열하진 못했지만 오늘날 한국의 많은 대학에서 매체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물론 이런 시류엔 자치언론인 교지도 무풍지대는 결코 아니었다. 총학생회가 교지대금을 무기로 교지를 고분고분한 나팔수로 전락시키는 것은 다반사고, 재단과 학교 운영에 딴죽을 걸었다고 배포중인 교지를 하룻밤만에 싹 쓸어가버린 일련의 사건도 있다. 이처럼 학내언론을 기관지쯤으로 여겨 가하는 외압에 언론인들은 맞서고, 모종의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근본적 문제엔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독자, 다시말해 대학생들의 무관심이 그것이다. 경쟁이 심화되고 각박해지는 대학 풍토속에 인력난을 겪다가 결국 사라지는 대학언론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학보와 철지나 눅눅한 교지는 비 오는 날 간이우산으로, 자장면 깔개로 혹은 컵라면 덮개로 쌩뚱맞게 제2의 기능을 하는 용품이 되어버린 시대다.
덧붙이지면 과거 학내언론은 대학에서 유일한 소통수단으로 진보적 의제를 형성한 주체였지만 그 자리를 기성매체와 온라인에 내주고 말았다. 이 밖에도 흔들리는 정체성과 콘텐츠의 부족·관성적 태도·학생들과의 괴리에 대한 지적은 학내언론의 체질개혁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학언론도 참여와 소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가톨릭대학보>는 누리집을 만들고, 토론게시판을 별도로 마련해 운영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언론과 관련해 산적한 난제들을 풀어갈 뾰족수를 마련하는 건 언론인들의 노력을 요하겠으나 여러분들의 언론에 대한 비판과 격려, 관심이야말로 큰 힘이 될 성싶다.
복심지우(腹心之友)
'마음이 맞는 막역한 사이'라는 뜻으로, 원활한 상호소통과 의사교류를 의미하는 고어이다.의 마음으로
새내기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제 막 대학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낯설고 생소한 것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생활패턴이나 학업 등 전반적인 변화는 이제 여러분도 말로만 듣던 88만원 세대, 한국의 20대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것은 점점 엄혹해지는 사회에 직면한 대학생들이 남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자기와의 싸움을 벌인다는 것이리라. 10학번 대학생으로서 사회라는 생활공간에서 느끼는 문제의식, 친구와 선배로부터의 유대감, 그리고 사소한 모든 것들을 ‘나’와 같은 대학생들과 나눠볼 것을 권한다. 그것이 비판이건 분풀이건 간에 그것을 소통하는 창구가 대학언론이길 바란다. 오늘날 소통을 의미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과 매체를 뜻하는 미디어(media)는 각각 라틴어 ‘나누다’와 ‘관계와 중간’이라는 의미에서 기원했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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