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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 어떻게 읽을까?82호(2023)/특집, 동화윤리 2023. 12. 30. 04:25
고경빈 수습위원
누구에게나 동화를 읽었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똑같은 역사를 공유한다. 바로 전래동화를 읽으며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방법과 시기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어도 우리 대부분이 「심청전」,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자라왔다. 그리고 또다시 지금의 아이들이 이런 전래동화를 읽으며 성장한다. 왜 우리는 몇백 년이나 지난 전래동화를 읽을까? 그렇다면 전래동화를 그대로 읽어도 될까?
몇백 년, 그 이상의 이야기.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동화를 읽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도 그 시기를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지금의 어린이들이다. 도서관 어린이 서가에는 이런저런 다양한 동화책들이 꽂혀있다. 그중에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제목들이 보인다. 바로 전래동화다. 나이를 막론하고 알고 있는 내용들. 아이들이 조금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런 전래동화를 교육의 하나로 배운다. 친밀하게 아이들에게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와 더불어 명백한 교훈이 있기 때문에 유아교육 현장에서는 전래동화를 많이 사용한다. 「심청전」을 통해 효를, 「흥부와 놀부」를 통해 정직과 성실을 가르친다.
하지만 단순히 전래동화에서 제시하는 단편적인 교훈만으로 전래동화를 가르쳐도 되는지는 의문이 든다. 스스로 비판적인 사고를 하기는 어려운 아이들에게 정형적인 가치관을 주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존여비와 같은 성차별적인 세계관, 미모 지상주의 세계관, 지나친 운명적 가치관이 그 예시다. 또한 전래동화는 출판 단계에서 그 폭력성이 줄어들긴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폭력적 행위나 지나친 불행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위험도 있다. 성심은 현대에서 전래동화를 다시 봄과 동시에 교육적인 측면에서 윤리적으로 전래동화를 읽는 방법을 고민하고 그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 콩쥐팥쥐 이야기
콩쥐팥쥐 이야기는 착한 콩쥐와 악독한 계모와 그의 딸 팥쥐가 함께 살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착한 콩쥐는 행복해지고 계모와 팥쥐는 불행하게 산다는 권선징악의 이야기이다. 줄거리를 생각해 보자. 콩쥐는 예쁜 얼굴처럼 예쁜 마음씨를 가졌다고 소개된다. 이게 바로 주인공, 즉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인물의 설정이다. 이와 반대로 계모와 팥쥐는 못된 만큼 얼굴 역시 못났다는 소개가 나온다. 자연스럽게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착하고, 외모가 뛰어나지 못한 사람은 나쁘다는 두 속성이 대비되는 것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주인공은 주로 못된 인물에 의해 고난과 역경을 맞게 된다. 콩쥐 역시 그렇다. 물론 이런 이야기 진행 방식은 많은 전래동화에서 등장하지만, 콩쥐팥쥐 이야기를 중심으로 더 바라보고자 한다.
「콩쥐팥쥐전」 삽화. 콩쥐의 외모와 팥쥐, 계모의 외모를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최동호 콩쥐는 독자에게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고, 독자는 못되고 추한 계모와 팥쥐를 미워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행위는 옹호해서는 안 되고 비판해야 할 괴롭힘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는 속성은 절대 정당하지 않다. 이는 쉽게 아이들에게 외모 지상주의 선입견을 주입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상 사회적 미적 기준이 도덕적 행위의 속성이 되지 않으며, 그렇게 가르쳐서도 안 된다. 만약 아름다운 주인공은 착한 행동을 하고 못생긴 악역이 나쁜 짓만 한다면 아름다운 것이 착한 것이고 추한 것이 곧 나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질문에 우리는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지만 콩쥐팥쥐를 포함한 많은 전래동화에 이런 아름다움과 못남, 선과 악의 단순한 대비가 등장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가르치고 또 이야기를 각색할 때 외모가 도덕적 행위에 결부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둘, 흥부와 놀부 이야기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제비가 착한 흥부 가족에게는 보물과 복이 든 박 씨를, 놀부 가족에게는 갖은 불운이 담긴 박 씨를 주어 흥부네는 행복하게, 놀부네는 불행하게 산다는 일종의 권선징악 교훈을 담은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는 교훈보다는 장애와 관련된 인식을 바라보고자 한다. 「흥부놀부전」에서 놀부 내외가 박을 타자 박 속에서는 수많은 장애인이 등장한다. 이들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장애인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비렁뱅이쯤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원전인 <흥보가> 중 한 대목이다.
슬근슬근 거의 타니 필채 꿰미가 박통 밖에 뾰조록이. 놀보가 보고 좋아라고, "애거, 이것 돈꿰미!" 쑥 잡아 빼어 놓으니 줄봉사 오륙백 명이 그 줄들을 서로 잡고 꾸역꾸역 나오더니, 그 뒤에 나오는 놈 곰배팔이, 앉은뱅이, 새앙손이, 반신불수, 지겟다리에 발 디딘 놈, 밀지(蜜紙)로 코 덮은 놈, 다리에 피 칠한 놈, 가슴에 구멍 난 놈, 얼어 부푼 낯바닥에 댕강댕강 물든 놈, 입술이 하나 없어 잇속이 앙상한 놈, 다리가 통통 부어 모기둥만씩한 놈, 등덜미가 쑥 내밀어 큰 북통 진 듯한 놈 (중략) 그저 꾸역꾸역 나오는데, 사람들 모은 수(數)가 대구 십월령(十月令)만한데 각청으로 "놀보 불러! 놀보 불러!" 이런 야단이 없구나.
복의 의미를 담고 있는 흥부의 박과 대비되는 놀부의 박에서 신체장애인이 나온다는 것은 장애에 대한 당시 과거의 차별적 시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장애는 아픈 것이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불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부분을 동화에 그대로 반영해 아이들에게 읽힌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장애는 곧 나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될 수 있다. 이런 부분을 어떻게 각색해야 하는지, 각색하지 못했다면 이런 부분을 어떻게 지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흥부놀부전」 삽화. 흥부 가족이 박을 타고 있다. 이후 등장할 놀부 가족과는 반대로 밝은 모습이다. ⓒ최동호 셋,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떡을 팔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가 동아줄을 잡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이야기 역시 동화책으로 많이 접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남매의 모습과 말을 통해 성에 관한 고정관념과 차별적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오누이가 호랑이를 만났을 때 오빠는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표현이 없는 반면 여자인 동생은 무서워하며 오빠에게 의지하려는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동화의 결말을 보면 달님이 된 동생이 무서워해 낮에 다니고 싶어 하자 남자인 오빠는 약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인 여자 동생을 지켜주기 위해 낮과 밤을 바꾼다. 여기서 여자는 나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남자는 용감하고 강인하여 여자를 지켜줘야 하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호랑이를 피해 도망칠 때 동생은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하는 말이나 나무 위로 올라올 방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오빠는 재치 있게 여동생의 말들을 방어한다. 이 부분은 여자 동생을 바보 같은 모습으로 만들고, 오빠를 영리하고 명석한 모습으로 만든다. 동생을 나쁜 속성을 가진 호랑이보다 더 모자란 모습으로 규정시켜 남자의 지혜를 부각하고 여자를 단순히 보조적이거나 어리석은 위치에 놓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견우와 직녀」에서 남자에게 빠져 제 일을 저버린 후 슬퍼하는 결말을 맞는 직녀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이런 어리석은 여성의 모습이 어떠한 교훈이나 이야기의 주제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이 읽는 전래 동화에 성차별적인 요소가 표현되어 있다면 성차별을 배우게 되고 그대로 생활에 적용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남자와 여자의 성격과 행동은 차별적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행동의 묘사는 성차별적이다. 전래동화에 반영된 과거의 성역할과 성차별은 현재에선 잘못된 것으로 가르치고 있고 아이들이 그대로 배워서는 안 된다. 또한 단순히 남성과 여성 두 성으로만 보아서도 안 될뿐더러 고정된 속성 역시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성차별적 이야기와 언어는 노력과 의식에 따라 충분히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가르치는 교사나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 각색하여 편집하는 사람의 선별과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심청전」 삽화. ⓒ최동호 동화를 다시 읽는다는 것
교복을 입을 때쯤이면 슬슬 동화를 읽지 않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동화를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동화는 어린이들만의 이야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다 커서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어른들이야말로 다시 동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새로 쓰이는 동화는 시대성과 변화하는 가치관에 맞추어서 창작된다지만, 아직 전래동화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아이들이 건강한 생각을 할 수 있고 진보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걸을 수 있도록 어른들이 전래동화에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전래동화를 다시 읽고 변화시키며 아이들이 콩쥐팥쥐를 통해 외모 지상주의가 아닌 괴롭힘에 대한 경계를 배우고, 흥부와 놀부를 통해 차별적인 시선이 아닌 선한 행동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을 키우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통해 성차별적인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 그리고 지혜와 용기를 깨우치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김환희, 「옛이야기와 어린이책 : 잃어버린 옛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서」, 창비, 2009.
김병건, 정정희. (2015). 전래동화의 윤리 미학적 내용분석. 어린이문학교육연구, 16(2), 233-253.
박은하. (2009). 한국 전래 동화에 표현된 성차별 언어. 아시아여성연구, 48(1),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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