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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과 신사임당, 10만원과 김구52호/뫼비우스의 띠 2010. 2. 26. 01:39
편집위원 정승균
신사임당 하면 당신이 떠오르는 것은?
여러분이 ‘신사임당’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 치마폭에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 그리고 그중에서도 ‘현모양처’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제는 앞선 생각들보다 ‘5만원’이 먼저 생각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2009년 6월 23일 새롭게 5만원이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5만원권은 아직 실생활에 잘 쓰이지는 않지만 꽤 긴 시간동안 3종으로만 운영되던 한국에서 새로운 지폐가 추가된 것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만한 일입니다. 5만원권은 10만원권과 함께 발행되기로 하였지만 한국은행은 여러 이유를 들어 10만원권 발행 추진을 중지하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새롭게 나온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의 모습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었습니다. 먼저 한국은행은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이번 결정이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신사임당을 5만원권의 모델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여성운동단체들은 신사임당이 가부장적 현모양처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신사임당과 함께 도안 후보에 올랐던 유관순 열사가 지폐 도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신사임당의 도안 선정에 반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 속에서 한 사회 속에서 지폐와 그 속의 도안이 꽤나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한국의 지폐와 도안들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폐하면 생각나는 사람들
한국의 지폐종수는 얼마까지 오랜 시간동안 3종으로 유지되다가, 이번에 5만원권이 추가되면서 4종으로 늘어났습니다. 3종 모두 앞면에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먼저 이전까지 가장 큰 금액이었던 만원권에 그려져 있는 세종대왕, 그 다음으로 5천원권에 율곡 이이, 마지막으로 1천원권에 퇴계 이황이 있습니다. 더불어 지폐는 아니지만 5백원짜리 동전에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있습니다. 한국의 지폐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인물인 세종대왕은 조선의 기틀을 잡은 왕이며, 한글을 창제했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지킨 장수인 이순신 장군도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퇴계 이황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라 하고,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라 네이버 백과사전이 설명합니다. 조금 더 백과사전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갈등 해소에 노력했고 ‘시무육조’와 ‘십만양병설’에 대해 나오며, 이황은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이고 ‘영남학파’를 이루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앞선 이이와 이황에 대한 설명들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처럼 저에게 가깝게 와닿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외국인이 천원, 오천원권 지폐를 보여주며 이 인물이 어떤 인물이며, 무엇을 한 인물인지 자세히 물어본다면 난처할 것만 같습니다. 사실 이황과 이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천원과 오천원권 지폐이지 않습니까.
한국의 지폐 속 인물들을 보면서 드는 의문들
사실 한국 지폐 속 인물을 보면 여러 문제가 눈에 보이기 마련입니다. ‘왜 모두 조선시대 인물인지’, ‘왜 모두 李씨 성을 가진 인물인지’, ‘왜 모두 남성인지’, ‘왜 유학자가 이리 많은지’ 정도로 생각되는데요. 이번에 신사임당이 새겨진 5만원권이 나오면서 이씨 성 외의 인물이자 여성이 들어감으로써 몇 가지 의문은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조선시대 속 인물이 21세기 한국에서 통용되는 지폐에 새겨져야 하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인물들의 경우 실제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과거의 인물이기 때문에 자주 표준영정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김민수, 「한국 화폐의 초상과 기억의 죽음」, 『한국근대미술사학』제17호, 2006에 따르면 퇴계 이황의 표준영정을 그린 이유태와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을 그린 김기창의 친일경력은 자주 문제가 되었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그린 표준영정 속 인물들의 모습이 화가 자신을 닮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제가 한국의 역사에서 조선을 부정한다거나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폐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조금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잠시 지폐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1694년 영국에서 유럽 최초로 성공적인 은행권을 발매합니다. 어음형태의 이 은행권 이후로, 현대적 의미의 지폐로 불릴만한 은행권은 역시 영국에서 1833년 발행된 은행권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영국지폐에는 ‘I promise to pay the bearer on demand the sum of pounds’, 이를 해석해보자면 ‘이 은행권을 지닌 사람에게 액면 금액을 지급할 것을 약속한다’라는 내용이 써있다고 합니다.
박구재, 『지폐 꿈꾸는 자들의 초상』, 2006, 황소자리 참조 여기서 지폐와 국가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지폐가 이용되기 전 화폐로 주요 이용되었던 금화나 은화는 그 재료인 금이나 은이 일종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는 재료만 보았을 때,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합니다. 국가가 지폐의 가치를 보증해주지 않는 한 ‘지폐’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본디 지폐는 국가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며, 한 국가 내에서 통용되고, 국가가 그 가치를 보증해준다는 점에서 지폐는 국가와 땔래야 땔 수없는 관계인 것이지요. 그렇다보니 국가를 상징하는 그림이 지폐에 들어가기 마련이고, 지폐 자체가 국가를 상징하고는 합니다.
다른 국가 지폐 속 인물들
그렇다면 앞서 말했던 국가와 지폐 도안과의 관계를 다른 나라의 지폐를 보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국제통화로 사용되고 있는 미국의 달러의 경우, 지폐 앞면에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험 링컨, 벤자민 프랭클린 등 미국의 건립에 큰 역할을 했던 정치인이나 높은 평가를 받았던 대통령이 화폐에 얼굴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도상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 온 멕시코에는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 독립운동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고대 아즈텍의 통치자 네사우알코요틀 등이 지폐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멕시코 옆동네 쿠바에는 유명한 혁명가인 체 게바라, 쿠바의 독립을 위해 싸운 인물들, 그리고 역시 쿠바 혁명에 참여했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투사 시몬 볼리바르가 그려져 있는 것처럼 중남미 국가들은 국가의 독립과 식민지 해방에 기여한 인물들이 지폐에 새겨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가까운 아시아 국가들의 지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에는 중국 독립과 공산혁명의 영웅인 마오쩌둥이 모든 지폐에 그려져 있고, 중국과 여전히 분쟁중인 대만에는 마오쩌둥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국민당의 장제스, 그리고 중국혁명의 지도자였던 쑨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의 오랜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혁명가 호치민의 모습이 모든 지폐에 새겨져 있고, 인도에서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위해 싸운 간디가 역시 모든 지폐에 그려져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식민지의 역사를 겪었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독립을 위해 싸운 인물이나 독립 이후 국가의 건립에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 화폐에 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한국의 지폐는 대한민국이라는 현대적 의미의 국가의 건립에 기여한 인물도 아니며, 일제 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위해 싸운 인물도 아닌, ‘조선’이라는 근대적 국가 건립 이전 과거의 인물들입니다. 왜 조선시대 인물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지폐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슬픈 역사의 한계
앞서 했던 질문의 답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후 한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싸웠습니다. 좌익이라 불리는 독립운동 세력에도 우익이라 불리는 독립운동 세력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한계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식민지 해방 이후에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로웠던 친일파들과 자신이 권력을 가져야겠다는 야망을 품은 남북의 정치인들에 의해 분열된 국가가 태어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근대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인물들이 남북에서 정적에 의해 수청당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분단에 큰 역할을 했던 자신의 얼굴을 지폐에 새겨 넣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은 하야하고, 지폐 속에서 ‘건국의 아버지’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잠시의 평화 뒤에 쿠데타에 의해 박정희 군부 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어떤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정권이었기에, 지폐 속에 자신의 결함을 돋보이게 할 인물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잘 아시다시피 박정희는 일제가 만주에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였으며, 해방 후 사회주의자로도 활동했었습니다). 이승만의 전례를 보아 자신의 얼굴을 넣는 것도 부담이 있었을 겁니다. 이렇다보니 결국 과거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유교의 충효(忠孝)사상은 정권유지에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후 헌정사상 민주적으로 정권이 교체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정권들도 정당성과 정통성이 없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참여정부에 이르러 김구 선생과 유관순 열사가 지폐 도안으로 거론되고 결국 10만원에 김구 선생의 모습이 들어가게 된 것은 참여정부가 앞선 정부들보다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는 이번 정권에 이르러 신사임당 도안의 5만원권만이 발행되고 함께 발행될 예정이던 김구 선생 도안의 10만원권이 발행되지 못하는 상황은 단지 우연한 결과일까요.
김구 선생의 모습을 지폐 속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앞서 말했듯 여론조사를 통해 결정된 김구 선생의 모습이 담긴 10만원은 정권이 바뀐 지금 발행 추진이 중지되었습니다. 한국은행은 여러 이유를 들고 있지만, 지폐 속 인물 때문이라는 의혹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 5만원권과 10만원권의 인물이 반대였더라도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잠시 일본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본은 2004년 20년만에 지폐 도안을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1만엔권의 모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바꾸지 않았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로, ‘탈아론’을 주장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기초를 만든 인물입니다. 일본이 아직도 2차대전의 일을 반성하지 않고, 교과서 왜곡을 저지르는 일과 더불어 지폐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김구 선생 지폐 속 인물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김구 선생은 그동안 지폐를 지나갔던 인물들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동안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했던 지폐 속 인물이 시대와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이며, 이전까지 국가의 상징성을 가지지 못했던 지폐가 ‘대한민국’의 상징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만의 지폐에는 아마추어 야구선수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4․19 이후 잠시 동안 한국의 화폐에는 4․19를 상징하는 횃불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지폐 속에도 2002년을 상징하는 축구선수들의 모습이 들어갈 수도 있고,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람들이 그려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지폐가 지금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는 모습을 가지길 바래봅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박구재, 『지폐, 꿈꾸는 자들의 초상』, 2006, 황소자리
캐서린 이글턴․조너선 윌리암스 외 지음, 양영철․김수진 옮김, 『MONEY 화폐의 역사』, 2008, 말글빛냄
정현원, 「문화적 상징기호로서의 지폐 디자인 연구」, 『디자인학연구』통권 제60호, 2005
김민수, 「한국 화폐의 초상과 기억의 죽음」, 『한국근대미술사학』제17호, 2006
김판수, 「‘국가’에 의한 상징에서 ‘국민’을 위한 상징으로」,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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