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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퍼플레이77호/시나브로 2020. 11. 27. 22:55
김정연 수습위원
출처: 이원선 기자, 신민아 "여성 중심 영화 기획˙투자˙개봉 쉽지 않다", 인사이트 ‘2019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영화는 스크린 노출 빈도가 높아야 평균 관람객 수가 높다.1] 즉, 영화 흥행에 실제 영향을 주는 것은 감독이나 주연의 성별이 아니라 배급 규모라고 할 수 있다.1)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여성은 더 줄어든다. 제작비 10억/스크린 수 100개 이상에 해당하는 여성감독 영화는 전체의 11.7%이다. 이런 구조는 마치 깔때기와 닮아있다. 자본이라는 깔때기에 걸러져 여성감독의 상업영화, 독립영화 중 소수만이 스크린에 걸린다. 세상에 나왔지만, 사람들에게 도달조차 되지 못한 여성영화가 쌓여간다.
이 시점에서 여성서사의 무대가 되는 곳이 있다. 성심은 9월 23일 여성영화 스트리밍 플랫폼 ‘퍼플레이’의 조일지 대표를 취재하며 여성영화의 계보를 찾아보았다. ‘퍼플레이’는 여성의 관점에서 영화시장의 악순환을 끊고자 시작되었다. 이곳에선 오직 여성영화만 유통되고 있다.
사진출처: 퍼플레이 공식 홈페이지 스크린 속 사라진 여성을 찾아서
퍼플레이는 사라진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퍼플레이를 고안하게 된 계기를 묻자, 조일지 대표는 ‘왜 똑같은 학교와 학과를 나와 영화산업계로 진출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퍼플레이를 시작했다고 답했다. 2018년 기준 연극영화과 입학생 중 여성 비율은 59%다. 하지만 여성감독 비율은 10년 전보다 낮아진 12.3%로 역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한다.2) 감독 외 인력 비율 역시 여성이 남성보다 낮다. 2014~2018년 상업영화 76편 중 핵심 창작인력의 여성 비율은 각본, 프로듀서, 감독, 제작, 주연, 촬영 등 모든 분야에서 30% 미만이다.3) 따라서 퍼플레이는 영화 제작부터 상영 때까지 여성 참여 비율이 낮은 점과 여성 영화인들이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 두 측면에 집중한다.
퍼플레이 속 여성서사
“퍼플레이가 생각하는 여성서사는 ‘여성의 이슈’를 다루는 것이에요.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 말하거나 여성의 관점에서 주인공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상업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닌 인물은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캐릭터를 일반화하거나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최근 소비자들의 선호에 따라 상업영화에서도 점점 ‘진취적’이라 표현되는 여성 캐릭터가 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일지 대표는 “소비자들의 요구로 지금까지 남성 캐릭터가 수행하던 것을 단순히 여성으로 성별만 바꾸는 모습을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퍼플레이는 다양한 캐릭터가 다양한 방법으로 등장하는 여성 독립영화에 집중한다. 이들의 여성서사는 종종 ‘파격적이다’, ‘도전적이다’, ‘생소하다’고 불리지만 실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소소한 일상부터 퀴어, 2차 성징, 디지털 성범죄, 특정 직업군 여성의 노고 등 여성의 현실적인 삶과 가장 가까운 일을 그대로 그려냈을 뿐이다.
사진출처: “29세가 날 성폭행했다”…‘69세’ 노인 여성의 목소리, 중앙일보 네이버 포스트 여성의 삶은 모두 다르면서 유사하다. 스펙트럼의 끝과 끝에 있는 개인들은 정반대의 존재 같지만 ‘여성’이라는 범주로 묶일 때 공통된 경험을 체험한다. 8월경 영화 <69세> 가 개봉했다. <69세>는 60대 주인공이 성폭력 범죄 피해 사실에 고립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맞서나가는 이야기이다. 영화 개봉 직후, 비난 댓글과 별점 테러 등으로 별점이 2점대까지 내려갔다.4)
‘장르를 판타지로 바꿔야겠다‘ - 영화에 대한 네이버 댓글 중 하나다. 영화의 내용을 판타지, 즉 비현실적이라 하지만 <69세>는 실제 여성 노인 성범죄 사건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괴리는 생소함에서 기인한다. 여성이 처한 현실을 미디어를 통해 가감 없이 밝혀내는 것이 낯설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여성을 성공한 인물이나 영웅으로 그리는 것만을 여성서사라 말할 수 없다. 여성의 일상에 도래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계속해 말하고 이어나가야 한다. 이런 여성서사의 시도들은 실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좁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여성영화의 선순환 구조
퍼플레이가 서비스하는 여성영화는 대부분 이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퍼플레이의 차별화된 서비스로 볼 수는 있지만 그만큼 여성영화가 유통될 시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러 곳에서 독립영화제를 개최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사람만 참석하며 몇 개의 작품들만 주요 시장에 유통될 기회를 얻는다. 소수의 계열사가 영화산업을 이끄는 구조 속에서 독립영화의 유통 폭은 매우 좁다. 운 좋게 기회를 잡았다 해도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면 영화인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거의 ‘0’에 수렴한다. 퍼플레이는 영화인이 영화만으로 경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을 때 여성영화가 깊고 넓게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제 수익의 70%를 여성 창작자에게 환원하는 구조를 세웠다.
“서비스를 준비하며 영화를 조사해보니 ‘한국엔 여성감독이 없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여성감독이 만든 작품을 조사했어요. 장편은 200여 편, 단편은 900편 정도 되더라고요. 이 많은 영화를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는 거죠. 장편으로 상영된 것들은 그나마 관객들이 찾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영화들은 작품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퍼플레이는 영화와 더불어 온라인 영화 매거진 ‘퍼줌’을 제공한다. 퍼줌은 여성영화에 대한 평론이나 여성감독의 인터뷰를 게재한다. 각 코너의 공통점은 여성이 여성영화에 대해 분석하고 쓴다는 점이다. 조일지 대표가 유튜브의 영화 소개 채널을 조사했을 당시 딱 한 곳을 제외하고는 채널 운영자 및 출연자가 모두 남성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퍼줌을 여성영화의 담론장으로 만들고 있다. 퍼줌에 실린 선배의 이야기를 여성 영화학도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나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퍼플레이는 여성영화의 선순환 구조를 새로이 쓴다. 여성 영화인이 제대로 된 처우를 받을 것, 여성영화가 활발히 유통되고 대중이 이를 언급할 것. 앞서 말한 문제의식을 플랫폼과 퍼줌을 통해 드러낸다.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묻혀있던 것이다. 여성 영화의 기록이 이곳에서 발굴되고 새로 쓰인다.
사진출처: 퍼플레이 공식 홈페이지 혼자 아닌 연대로 만드는 여성서사
퍼플레이는 영화 유통 외에도 여러 캠페인을 진행한다. 올해 퍼플레이는 영화 <아랫집>의 결제 금액만큼 ‘십대여성인권센터’에 후원금을 보내는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또한 ‘한국퀴어영화제’, ‘동물권행동 카라’와 함께 ‘온라인 영화제 상영관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처럼 퍼플레이는 독자생존이 아닌 공존으로 가치를 잇는다.
영화 <미쓰백>과 <허스토리>같이 특히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의 관람객들은 영화의 손익분기점을 달성시키기 위해 단체 관람, n차 관람을 한다. 현시점에서 여성 영화가 지속되려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구조를 움직이기 위해선 다양한 부분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움직여야 한다. 결국, 모든 것은 연대로부터 출발한다.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쓰인 영화는 퍼플레이를 통해 발화되고 소비자는 여성영화의 소비로 응원한다. 여성서사는 연대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작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영평 10선2]에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가 이름을 올렸다.5) 독립영화로 국내외 영화제 59관왕을 달성한 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다.6) 벌새 외에도 <69세>, <남매의 여름밤> 등의 여성감독이 연출한 독립영화가 해외 영화제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7) 혜성 같은 몇 작품을 제외하면 여성영화의 현실은 사실 10년 전과 다를 바 없다.8) 하지만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수치론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많은 것이 꿈틀댔다. 퍼플레이와 같은 플랫폼이 생겨난 것, 여성영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 우리가 이것의 중요성을 인지한 것 모두 돋아나기 위한 프롤로그인 것이다.
제22회 서울국제영화제 박광수 집행위원장은 “로카르노‧부산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들이 여성 감독 작품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을 영화제 홍보에 사용할 정도로 여성 관련 내용이 시대 흐름이 됐다” 고 말했다.9)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뀌어야만 한다. 스크린 안과 밖의 모든 여성이 엔딩 크레딧에 올려지기를 바란다.
<각주>
1] 스크린에 더 걸린 여성감독의 영화(여성감독 개봉작 22편)보다 상대적으로 덜 걸린 여성주연 영화(여성주연 개봉작 63편)의 평균 관람객 수는 약 19% 낮았다.
2]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들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 각 부문과 별도로 작품 미학성에 주목해 올해 발군의 열 작품을 ‘영평 10선’으로 결정한다.
<출처>
1) 영화진흥부흥회, 2019, 2019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
2) 김수정, 통계로 재확인된 ‘영화계 남초 현상’, 2019.10.7., 노컷뉴스, <https://www.nocutnews.co.kr/news/5224359>
3) 영화진흥부흥회, 2018, 2018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
4) 최영주, ‘69세’ 별점 테러로 드러난 ‘노년 여성’ 향한 편견, 2020.8.22., 노컷뉴스, <https://www.nocutnews.co.kr/news/5399088>
5) 조연경, 39회 영평상 봉준호 ’기생충‘ 최우수작품상, ’벌새‘ 5관왕(종합), 2019. 10. 21.,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23632054>
6) 박정선, 전세계 영화제 59관왕 ’벌새‘, 북미 개봉·일본 상영관 확대, 2020. 7. 20., 일간스포츠,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3821633>
7) 이유진, ’벌새‘ 뒤이은 여성 감독의 저력, ’69‘세’남매의 여름밤‘ 해외 영화제 러브콜, 2020.9.1.,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011424001&code=960100>
8) 김경학, 여성 감독 비율 10%, 10년간 변하지 않은 영화계, 2019.12.16.,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2162124005>
9) 나원정, 이름·대화 없는 여성 캐릭터 그만…비주류 넘어 흥행 코드 된 '여성', 2020.9.7.,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23866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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