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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을 위한 여성서사의 여명기: 여명기77호/시나브로 2020. 11. 27. 22:07
김정연 수습위원
사진출처: 그녀의 심청 캡쳐 / 카카오페이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19년 콘텐츠 트렌드로 ‘다양성’을 전망했다. 전에 없었던 새로운 형식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등장했다는 것이다.1) 키워드 중 하나는 ‘여성’이다. 이를 통해 여성 콘텐츠의 가치가 중요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8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에 여성의 일상과 노동을 이야기한 <어쿠스틱 라이프>와 현대 여성주의 관점에서 심청전을 재해석한 <그녀의 심청>이, 그다음 해는 여성국극을 바탕으로 한 <정년이>가 선정되었다.2)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여성서사를 필요로 할까, 또 그들이 이야기하는 여성서사란 무엇일까.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심은 9월 6일, 여성서사로 주목을 받은 비(非)로맨스 단편만화 앤솔로지 ‘여명기’의 작가 ‘팀 총명기’를 인터뷰했다.
사진출처: 알라딘 여명기의 캐릭터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자신의 존재에 관해 묻고 가끔은 먼 여정도 떠난다. 누군가를 위해 곁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이별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우리도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주체로서 나는 누구인가?’ 결국은 또다시 대답 아닌 물음으로 귀결된다. 여명기는 어떠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닌 단지 자신의 발로 땅을 딛고 나아가는 여성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명기(女命)는 새날을 밝히는 빛(黎明)이라 말할 수 있다. 여명기는 여성서사의 과거와 미래에 닻을 올린다.
같고 다른 12개의 이야기
12개의 단편 만화는 각기 다른 세계관과 주제를 담고 있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코믹 스토리부터 AI까지 그 범주는 다양하다. 팀 총명기는 만화에 대해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 나아가서 앞으로 살아갈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에요. 더 다양하고 많은 여성이 주연이 되었으면 해요”라고 설명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처한 문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과 연대 의식이 해결의 열쇠가 된다.
기존 미디어에서 그렸던 소녀 가장 스토리의 출발이 가난과 가족 부양이라면 현실은 꼭 그렇진 않다. 이 여성을 구하러 올 백마 탄 왕자보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자리와 자신을 지지해줄 주변인들이 더 절실하다. 여명기의 작품들은 현대물부터 판타지를 아우르지만 가장 현실적인 위로를 남긴다. 판타지라고 해서 여성을 칭송하거나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을뿐더러 어느 시대, 어느 세계에 살던 묵묵히 개인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결핍이나 완벽과 관계없이 우리의 삶이 완성되는 것처럼.
앵몬 , ‘ 어느 날 ’, 사진 제공 : 팀 총명기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서사
“여성과 그 여성을 둘러싼 여성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구원하는데, 주연은 성장을 빌미로 조연을 착취하지 않고, 조연은 역할을 빌미로 자신의 존재를 축소하지 않는다. 현실의 여성들이 그렇기를 바라는 것처럼.”
_<이다혜, 우리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여명기>여명기의 여성서사는 로맨스를 제외했다. 로맨스를 덜어내니 그 자리에 다른 관계들이 차올랐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자매와의 관계, 가족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 여명기의 관계는 나를 소모하거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캐릭터들의 디자인과 삶을 통해서 여성의 삶으로 특정된 경계가 조금 더 확장될 수 있기를 바랐어요. 사회적 여성상과 특정 나이대에 국한된 것들을 수행하지 않는 여자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래서 여성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여성스러움으로 일컬어지는 외적 특징을 덜어냈어요. 또 캐릭터들의 나이와 그에 따른 행동에도 큰 제약을 두지 않았어요.”
마빈 , ‘ 노아의 방주 ’, 사진 제공 : 팀 총명기 여명기는 올해 2월, 텀블벅을 통해 4,455명의 후원을 받았다. 팀 총명기는 이에 대해 “4,000명이 넘는 후원자들이 작가들의 팬이었거나 기존 작을 읽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신 여명기의 테마가 원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욕구를 자극하고 재조명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미디어가 표현해 왔던 여성, 그 밖으로 뻗어 나가는 이야기를 현실의 여성들이 원하고 있다.
그렇다 해서 여명기는 치열한 여성 운동만이 여성의 삶이라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되, 언제나 있어 왔던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팀 총명기는 “여성의 삶이 꼭 투쟁적이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이 있기 때문에 작가들이 이를 작품에 녹여 내려 노력했어요”라 말한다.
지금 여성서사가 원하는 판타지라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 그리고 유쾌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그리는 것. 이를 여명기를 통해 희망해 볼 수 있다.
앞날을 밝힐 여명(黎明)으로서의 여명기
“우리가 기존의 것을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테고리가 순정이나 로맨스 등으로 엮였을 뿐이지 내용은 이성애 중심이 아닌 여성 주연 작품들도 있어요. 혹은 로맨스의 비중이 크지 않은 작품들도요. 다만 널리 알려지지 못했거나 로맨스 서사가 미디어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어서 비로맨스가 주목받은 것으로 생각해요.”
앞서 언급하던 여성서사와 결이 다른 로맨스 카테고리에도 시대와 여성의 요구를 반영한 새로운 시도들이 역사와 함께 존재해왔다. 1990년대 여성의 사회 진출과 대학 내 여성운동이 두드러지면서 순정만화는 여성들의 ‘정서적 동맹’이라 불리기도 했다.3) 이진경 작가의 <피플>이라는 순정만화에선 다양한 여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집중하고 여성 공동체와 퀴어 담론을 풀어내기도 했다. 어느 정도의 한계는 있었지만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여성서사의 변화는 늘 존재했었다. 2020년에는 이들과 바통 터치한 비로맨스 여성서사 여명기라는 작품이 있다. 이제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오직 ‘순정만화’를 통할 필요도, 그렇게 불릴 이유도 없어졌다. 여명기는 우리가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조력자이다.
그러나 여성서사의 변천과 무색하게 여전히 미디어에서 여성을 희화화, 대상화하는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진행한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사업’에 따르면 온라인 플랫폼에 연재되는 인기 웹툰 36편 중 성차별적 내용이 45건으로 성평등적 내용보다 5배 많았다.4) 또한 이들 다수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거나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고 밝혔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웹툰도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보지 않으면 작가도 이를 인지하고 바꾸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5) 전문가들은 앞으로 시장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와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리라 전망하고 있다. 그 때문에 매일 우리에게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문제를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작가들은 회사와 꼭 함께하지 않아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작품을 연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여러 여성서사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독립연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SNS 연재의 시초인 만화 <며느라기>는 여러 플랫폼에서 만화 투고를 거절당해 새로운 방식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6)이처럼 기존 거대자본 시장이 거절했던 여성서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혐오적 콘텐츠와 양립하는 여성서사는 전진과 후퇴 그 사이에서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멀리, 더 오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성을 위해 여성의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여성이 제약 없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을 픽션으로 나마 미리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우리는 0부터 시작하는 게 아님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팀 총명기
<출처>
1) 한국콘텐츠진흥원, 대한민국 콘텐츠산업 2018년 결산 및 2019년 전망 세미나, 2018.12.11. <http://naver.me/GnVK33bm>
2) 위근우, 2019., 지금, 만화, 한국콘텐츠진흥원.
3) 김은미, 2005., 시대별로 살펴본 순정만화의 페미니즘적 성취, 대중서사학회, 13, 37-61.
4)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보도자료) 성차별 움트는 성평등 사각지대…웹툰(양성평등 모니터링 결과 발표), 2018.12.27.
5) 박현주, 아이유 닮은 캐릭터? 네이버 웹툰 이번엔 여중생 강간·고문, 2020.9.13.,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23870896>
6) 성상민. 웹툰 ’며느라기‘작가가 오픈마켓으로 간 이유, 2019.7.3.,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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