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iversitas, Vanitas, Tobaccos51호/가대人 2010. 2. 18. 19:33
Universitas, Vanitas, Tobaccos
그대 지성인 아니 그저 지구인이라도 좋소, 대학생이여, 라틴어가 뭔지 몰라도 좋고, 영어 토익 한 번 안 보았어도 좋소. 대학교 교정 어느 곳에서라도 담배로 표현 못할 “허무”를 자위한 적이 있다면, 굳이 구구절절한 해설은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하오. 다만, “veni, vidi, vici”라고 외친 한 인물의 명언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오. Veritas관에서 출력한 등록금고지서와 성적표를 번갈아 보다 보면 어디에서 느껴지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으나 운율 비슷한 것이 전율시킬지도.
Max Beaver
김호영 사회학전공 05
나는 믿고 싶다.X파일 개봉영화 제목. 학점은 무엇인가? 학점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학점은 예정되어 있는가? 그것은 대학 생활에 대한 허무로 점철되어 있는 어떤 학생에게 있어서 X파일 그 자체이다.
2009. 3월 어느 날.
18, 19, 20, 21, 22, 23명.
아 담배나 필까? 상대평가로군.
담배 끊어야 되는데. 23명끼리 상대평가라니.
휴우~
2009. 1. 15 Veritas관. 수강신청. 그냥, 그러려니 한다. 담배나 피울까. 하지만 혹시나 다른 과목으로 갈 고마운 학우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담배를 피울 때, 비흡연자가 신청을 해버리면 그것 또한 낭패이다. 내가 심각하게 늦은 것인가? 아니다. 지금은 오전 9시 3분. 1분 안에 과목번호를 바로 입력하는 고학번의 노련함을 발휘했으나 어쨌든 실패. 담배나 피우자.
'A'과목을 신청하고 싶었으나, 1분도 안되어 정원초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과목을 위해서 하루 종일 컴퓨터에 앉아 수강신청 노가다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매크로를 돌리는 것은 본인의 정의감에 매우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낭만적이지 않아요.
결국, 'B'과목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교수님과의 첫 만남. 교수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 첫 시간부터 칠판에 적히는 라틴어의 생경함에 흠칫 했으나, 차마 다시 다른 과목을 신청할 번거로움까지는 의지가 닿지 않는다.
어쨌든, 수강변경 기간이 끝나고 강의 인원이 확정되었는데
23명인 것이다. 휴우.~
공부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현실은 나의 의지를 꺾어 놓는군. 지난 학기 어떤 수업만 해도 최종수강인원은 70여 명이 넘는 대형 강의. 그럭저럭 열심히 하지도, 대충 하지도 않았지만 입학 후 처음으로 받는 B+
Pass or Fail과목의 "A"같은 것은 “A"로 치지도 않는다. 그것은 누구나 받는 것이니까. 에 그만 또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아 끊어야 되는데. 그냥 B0도 아닌B+! 그 날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B는 C, D와는 품격이 다르다. A가 도대체 어떻게 받는지 모를 저 먼 Andromeda의 Amazing한 외계인들의 Awesome한 전유물 같은 느낌인 것은 분명하다. B가 그래도 Bright하게 공부해서 Brave하게 질문도 열심히 하고 결국엔 Bravo!하게 되는 점수라면, C는 Cruel한 수업 끝에 쥐어 짜낸 Cracked한 레포트에 대한 Critical한 교수님의 응징. D는 아무리 Dilligent하게 공부해도 Dangerous하게 F를 넘나들다 결국엔 Disgusting하게 되는 느낌인 것이다. 그렇다면 F는? “젊은 날의 초상(初喪)”에서 쌍권총 운운했지만, F야말로 가장 신성한 영역의 것이다. 그는 Fierce한 상대평가의 교실에는 더는 있을 수 없어 낭만에 대한 Faith를 설파하고 다니는 젊음의 Fire! 그의 순수한 열정은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배와도 같다. 그리하여 F를 받은 젊음의 용자(勇者)에게 다시 한 번 더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수강인원 23명 확정 후에 본격적으로 수업을 들으며 나는 이 수업의 비극을 발견하고야 만다. 눈에서 불이 나올 것 같은 학구열이 복학생1, 그리고 검은 뿔테마저 돋보이는 복학생 2, 또 그런저런 복학생3, 국민영재 송유근의 친구로 보이는 어린이 1, 뉴욕양키즈 캡 뒤로 삐져나오는 초록색 2가닥 더듬이의 외계인, 4년 장학생이라는 신입생 09학번 K승연군, 군 생활 내내 사복개론만 팠다는 예비 사회복지학 과탑 박군, 교생실습 간다며 장만한 정장을 새 학기라 한 번 입고 와본 4학년 형님. 아!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도 도저히 신입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상서로운 氣가 느껴졌다. 강의계획서를 모두 뽑아온 저 치밀한 계획성하며, 당장 면접에 나가도 손색이 없는 저 예비사회인의 옷차림은 뭔가? 이 무대는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인물들을 섭외하였군. 정말 대단한 연출입니다.
불합리하다. 부조리하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다. ‘상대평가’라는 평가방식의 맹점에 자신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사물을 감싸는 천상의 빛이 이 무대에 비치며 “너는 C+이상은 받기 힘들 것이니라.”하고 신탁이 내려진다. 아 神이시여 B0는 힘들겠지만 니코틴의 축복을 내려주소서.
누군가 말했다. “학점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Point Predestination Theory)”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러한 결정론적인 입장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학점은 가능한 것이라고.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낭만”은 결코 그따위 약해빠진 이론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또한 주장했다. “너의 학점은 정해져 있노라. 그러므로 시험 전날 까지도 음주를 할 수 있는 구원 또한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패배주의적이었다. 현실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도피의 기제로서 술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 술을 먹는다는 것은 절대, 불만족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그런 저급한 행위가 아니다. 술은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누리려고 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축복이었다. 음주는 낭만을 향유할 수 있는 고상한 대학생들만이 자율적으로 마실 수 있는 젊음의 발산인 것이다. 나는 믿고 싶다. 꼭 시험기간 맞춰 골라 몸 사려 피워주시는 꽃일지언정 그래도 아름다운 낭만이라고.
적당히 F는 받지 않을 만큼의 출석과, 분량을 다 채워서 기한 내에 제출하는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 그리고 단 한 번! 기말고사에서 대박을 내면 B0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학점을 결코 예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나는 다른 학우들이 도서관에서 몰래 공부할 때, 새터, MT, OT, 학회, 동아리 모든 술자리를 섭렵할 것이다. 낭만을 즐길 것이다. 놀랄만한 성적의 반전을 이루고 마음껏 비웃어 주리라. -술자리에서만큼은, 적어도 술 한 병 이상만 마시면 이러한 야망이 떠오르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야망은 Veritas관 컴퓨터에 정숙하게 앉아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꼭 적어야만 하는 것이다. 있어 보이는 사진과 함께. 적어도 투데이 3은 올라가겠지? 자작만은 금물이다.
그러나, 유가상승,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어쩌고 하는 여하튼 복잡한 미국경제의 위기, 자동차 산업의 침체, 우리나라의 높은 대미무역의존도로 인한 도미노 현상, 등록금 인상, 갈수록 높아지는 청년실업률 속에 자신을 제외한 22명의 학구열은 물가상승률만큼이나 높아져만 갔다. 더구나,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교수님의 ‘의미심 장한눈빛’에서 때맞지 않게 ‘데이비드 듀코브니
꽃피는 새 학기에 죽이 맞는 “질리언 앤더슨”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겠으나. 하긴 쥣뿔도 없는 대학생한테 전문직 여자친구가 있다는 설정도 와닿지는 않는다. ’같은 예지력은 “D~D~D~D~D~"를 머릿속에 울리게 하는 것이다. 그 때마다 그는 새파랗게 기가 죽었지만, 수업 당일 새벽까지 마셨던 낭만의 술을 밑천 삼아 결연한 마음을 다졌다.
‘교수님, 그리고 학우 22명 여러분. 논스톱이라는 프로그램도 안 보고 대학에 온 것입니까? 청춘시트콤은 한 편이라도 보고 온 것이오? 아니면 낭만이라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낭만이란 오롯이 대학에서만이, 젊음의 한 때, 바로 지금 이 순간, 저 꽃피는 교정에서만이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보드라운 일회용 물티슈 같은 것이지요. 떨어지면 한없이 추해지는 땡칠이 계단의 목련꽃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한 학기 유일한 배점 30%의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에는 빨간 사인펜으로 단 3줄이 적혀 있었고-단 3줄로 나의 숙취를 단숨에 깨버리게 하는 교수님의 신성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박 군은 유치원생인가요? 인용과 출처를 밝히는 것은 대학생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보고서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D! 아, 30%인데-. 내 이번 학기 중요한 성적의 지표인 30% 레포트가. C마저 아마도 니르바나의 세계에 있는 것이리라.
D+, 적어도 D+은 받아야 한다. 저번 학기 성적과, 이번학기 다른 과목들의 예상 점수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D+은 받아야 성적향상장학금을 노릴 수 있다. 그렇다. D와 D+은 다르다 THIS와 THIS PLUS만큼의 차이.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 미묘한, 차이. 디스도 +가 붙으면 프리미엄이 붙는다. 낭만도,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에서 오는 것이다. 성적향상장학금이야말로 이번학기 회심의 목표! 환산해 보자. 이 장학금을 상쇄하기 위해 내가 금연해야 할 담배 갑 수를. 편의점 알바를 몇 시간이나 해야 하며, 술집 서빙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학교 주변에서 법정최저임금 4000원과 야간수당이라도 제대로 지키는 업주, 업소가 있다면 또 모를 일이겠으나. 아 그냥, 내가 일했던 곳만 그렇게 열악한 것이리라고 담배 한 대 피며 생각해 본다. 뭐 다른 사람은 제대로 받겠지. 다른 알바자리는. 적어도 역곡역 밖으로 나가면 안 그러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학기 중 단 한 번 있는 시험에서 교수님을 감동시켜 보자! 논리정연하고 참신하게 역전시키는 것이다. 인생은 한 방이다. 나는 믿고 싶다.
학점은 답안지 너머에“The Truth is out there”, 데이비드 듀코브니 출연 영화 중...
나는 늦게나마 남은 수업에 집중하고, 필기하고, 송유근 친구한테는 과자도 사주고, 복학생 형들에게는 군 생활 얘기로 적절한 공감과 관심을 유도하면서 시험 관련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자세로, 거룩하고 신성한 자세로 수업에 임하기 위하여 담배를 끊겠노라는 무모한 도전까지 하기에 이른다. 어쨌든 기말고사이자, 단 한번 뿐인 시험은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시험 날, 때늦은 학구열로 만반의 준비를 하여 조금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도 늦게나마 출석률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교수님의 매서운 눈초리도 조금은 사그라든 것 같다. 어떤 개념이든 물어보라! 다 적어주리라.
그리고 시험 문제.
1) 법과 예술을 논하시오.(2000자 내외)
“법과 예술”강의를 하셨던 박선영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필자인 Max 비버군의 레포트에 빨간색 플러스펜으로 적으셨던 지적은 글자 한 자, 한 자,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 없는 교육의 효과를...
2) 문학은 사회 변혁 가능성 있나? (2000자 내외)
단 두 문제.
불현듯, 도서관에 꽂혀 있던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두꺼움이 생각나고, 멀더와 스컬리가 심각한 사건에 대해 얘기하며 짓던 건조한 표정들이 떠오르고,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했으나, 침착하게 결코 당황한 것만은 주위 학우들에게 들킬 수야 없다.
나도 공부를 하기는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건 뭘까? 문제 자체가 주는 생경함이 주는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 주위 22명의 펜이 일제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단순명료하고 부적절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적고 있는 22명의 존재가 심히 두렵다.
갑자기, 그저 보고 넘겼던 이상의 시가 생각난다.
.........
23인의 아해가 A+로 질주하오
...
제2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2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이십 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이십이의 아해와 무서워하는 한 명의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네 명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이상, 오감도, 시제 1호 . 20명 미만일 경우에 절대평가이다.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하였으면 그만이다.이상, 오감도, 시제 3호. “아 Fierce한 상대평가로부터 도주한 낭만Faith론자여! 축복받으라!”
“아 학우들이여 나는 당신과 학점을 놓고 싸우고 싶지 않소이다.”
올해 등록금 인상률, 물가 상승률, 실업률, 부모님의 수입 정도. 고3인 동생. 성적향상장학금. 새로 나온 담뱃갑의 거절할 수 없는 아름다움. 탁월한 디자인. 대학교를 나오지 않고 성공한 어느 재벌총수의 사례. 서태지의 교실이데아.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소크라테스의 죽음. 대학교육은 무상이라는 유럽 어느 나라 이야기. 빅뱅. 진화론과 창조론.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 뭉크의 절규. 잭슨 폴록의 작품들.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 주기도문. 간디의 비폭력무저항 운동.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X. 그들의 허무한 죽음. 읽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알고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스컬리, 나는 여기 실존하고 있는가? 아 허무한듸-
독을 차고, 김영랑,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D+ 건지기 위하여”
대략, 3-4분. 눈만 뻐끔거리고,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교수님의 눈에는 “아 저 학생은 시험 볼 때까지 저렇게 흐리멍덩하다”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으나, 그의 정신은 끊임없는 허무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인류의 숭고한 투쟁과 저항이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흠칫, 교수님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으나 적절하게 시계로 시선을 옮기며 “나는 절대 졸고 있지 않았음, 나는 고뇌와 사색을 하였을 뿐”임을 어필하며 현실의 세계로 무사히 안착한다. 성적향상장학금을 떠올려라. 비록, 내가 늦게나마 공부한 바가 답안지를 적는 데에 아무 효용이 없고 한 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답안지에 적어야 할 내용이 픽션이 되어버리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나를 슬프게 하더라도. D+이상은 받아야 하는 이번 학기 나의 숙명. 인생목표. 담뱃값과, 역곡역 근처에서 알바해서 벌 수 있는 쥐뿔같은 돈을 생각하라. 너는 쥐뿔을 구해올 수 있는가? 아니다. 식은 땀이 흐른다. 그리고 결국,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을 벌이고 만다.
존경하는 교수님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수님께 간곡한 편지를 구구절절이 적을 것을 결심한다. 성적이의신청 및 교수님께 직접 찾아가 사정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교수님의 눈빛 또한 대면을 허락지 않는 듯하다)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고. 참회의 마음에 금연하면서도 끊임없이 느꼈던 흡연욕구마저 새하얗게 잊는다. 돈은 내가 냈는데
사실, 부모님이 주시는 돈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이나... 왜 눈물은 내가 흘리는지 이것은 또 모를 일이다.
답안지에 3줄을 띄우고 ‘존경하는‘이라고 네 글자를 적는다. 그를 쏘아보던 교수님의 냉정한 눈빛, 학우들의 살인적인 비범함, 낙인 같던 레포트의 신랄한 지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러나 그는 적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능 고사장을 자발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느낌. 자발적인 입대날짜를 자신이 정할 수 있는 자유의 상큼한 느낌. 이 상큼함의 산도는 빙초산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우선, 기존 문학작품의 인용을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백지보다는 무언가를 적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진달래꽃’, ‘제망매가’를 적을 것인가? 우리나라 고유의 이별의 정한을 불러일으키며,
기말고사 후에 또다시 23명과 헤어져야 되는 운명적 필연을 교수님께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다. ‘동기로 세 몸 되어 다시 헤어질 교수님과 저희들의 운명은...’, ‘가시는 학문에의 길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러나 이를테면 ‘구지가‘는 안 된다.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의 뉘앙스가 너무 도발적이어서 역효과를 낼 확률이 높다. 어쨌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전문학의 단순한 인용은 교수님께 장난을 친다는 느낌이 들게 하며, 진지한 낭만주의자가 적어야 할 답안지의 윤리강령에도 심각하게 어긋나는 것이다.
그는 본격적인 작문에 앞서 이 글의 필수적인 요소를 나열하여 보았다.
1. 절대로 교수님께 학점을 구걸하는 것은 아니라는 치밀한 자연스러움
2. 나는 전적으로 교수님의 안부와 앞날의 무궁한 가정의 평화를
기원한다는 보편적 인류애의 호소
3. 다가오는 계절이 주는 생명의 이미지
나는 갑자기 김영랑 시인이 떠오르며 읽을 때 부드럽게 읽히는 유음의 사용마저도 쓸 것을 생각한다. 를 사용하여 상쾌한 감상의 유도
4. 세계 경제의 악화와, 청년실업 문제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자신의 의지 부각
5. 자신이 이번 학기에 필연적으로 수업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그럴 듯한 근거.
군 복학 후의 부적응, 연애문제의 어려움 등등.
6.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엮어 주는 서사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그는 계속 적기 시작했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려, / 또한 문장의 돌출과 문단의 나눔은 소설가 박민규의 것을 천박하게 즐겨 씀을 밝힌다.
메소포타미아의 찰흙 점토판에 쐐기 문자를 적듯, 꾸욱 꾹. 진정 예술성 있는 글이란 형식과 내용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체와 펜이 종이에 남긴 깊이까지도 치열함을 반영하여 올곧게 기록에 남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기록은 판독자인 교수님의 입장에서도 쉬이 보일 수 있어야 되는 것이리라.
교수님께
존경하는
교수님께.(‘존경하는‘이란 표현은 너무 낮은 자세이다. 나는 구걸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한 뉘앙스는 전체적인 글의 몰입에 있어서 치명적인 역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한 학기동안 저희들을(결코 나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쓴 것이 아니므로 복수형으로 적는 것이다. ’나‘ 혼자만의 교수님이 아닌, 23인의 교수님이므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실패로 야기된 미국경제의 위기는 참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대미의존도 높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절대로 나는 생각 없는 대학생이 아닌 것이다. 교수님의 수업을 충분히 들을 능력이 있으되, 단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다소 이 수업에 소홀했던 것 뿐이다.)
그러나,(이러한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다. 모든 종교의 기본 메카니즘. 광고의 핵심. 어두운 현실과 희망을 시간 간격을 두고 제시하는 ‘병주고 약파는’ 희망으로의 반전 그 자체인 것이다.)
6월의 완연한 초여름의 초록은(유월의 완연한-아 이 의도적인 ‘유음’의 사용은 김영랑 시인이 교수님이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탁월한 대학생인데!) 신자유주의 경제의 태풍 속으로(아 초여름이 지나면 태풍이 오는 이 물 흐르는 듯한 작문이여!)빠져들어만 가는 대학가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아무쪼록 이 초록의 빛처럼 교수님의 가정과 앞날에도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보편적 인류애의 호소야말로 이 작문의 주된 컨셉일 것이다. 보편적이어야 한다. 절대로 내 사적인 이해관계를 교수님께 암시하는 것이야말로 아닌 것이다.)동기로 세 몸 되어 헤어질 학우들과 교수님이지만(고전시가 ‘제망매가’의 이별의 정한을 상기시키면서 운명적인 이 만남과, 보편적으로 만나고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인류의 필연적 고독에 호소한다.), 그러나 저는 꿋꿋한 의지로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고 있으며, 군생활 후의 필연적인 부적응과, 이성과의 미로 같았던 갈등에도 수업의 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사회학적 상상력을 제시해 준 C. Light. Mills에게 변명의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는 흡족스럽게, 소위 선구자적으로 개척한 이 틈새작문의 효용성과 탁월함을 생각해 보며 미소 지어 보았다. 아 CAP할 때 이렇게 생각하면서 적을 걸....불현듯, 재수강해야 하는 CAP1과 CAP2, 그리고 아직 듣지도 못한 CAP3가 생각났다. 휴...
자 정리하세요.
5분 남았습니다.
하지만 장황한 서론에서 본론으로 전환하려는 이 중차대한 순간에 교수님의 단호하면서도 여유있는 목소리는 나의 신분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나는 역시 학생”, 역시 “교수님은 교수님”
젠장, 금연은 내일부터다!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 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날개, 이상.
그래, 시대를 앞서갔던 이상도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같은 작품. 알바자리나 구하러 가자! 오늘은 MarlboroMan Always Remember Lecture Because Of Repeated course Over. 어떤 위대한 시인은 CAP2재수강 수업이 끝나고 자신의 수중에 단돈 2500원이 남았을 때, 학생식당에서 컴비네이션을 먹고 커피를 먹을까 말보로를 살까 고민하던 중, 말보로를 사버리고 Veritas관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읖조렸다고 한다. 다!'51호 > 가대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내기호 평가서 (0) 2010.02.18 그리움을 만나다 (0) 2010.02.18 더 이상 방황으로의 방향은 없다 (0) 2010.02.18 미화된 자아, 페르소나 (0) 2010.02.18 #1.어버이날 전날밤 (0) 2010.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