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기호 국제학부 09
-무엇을 위한 삶인가?
한 노인이 어촌마을인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노인은 젊었을 때 작은 조각배로 어부 일을 시작해서 돈을 모아 선주가 되고 지금은 선박회사의 회장이다. 한마디로 금의환향 한 것이다. 그 노인은 향수에 겨워 젊었을 때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표정에서 자신의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 때 그 노인은 해가 하늘 높이 떠있는데도 불구하고 해변에서 잠을 자고 있는 어리석은 젊은이를 발견했다. 노인은 젊은이를 흔들어 깨운 뒤 자신의 성공의 비결을 가르쳐줬다. 바로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쉬지 않고 일해서 점점 배를 키우고 선원을 고용하고 다시 더 많은 물고기를 잡으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젊은이가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번 다음에는 뭐합니까?”
“보시게 이렇게 마음껏 쉬고 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생을 즐기고 있지 않나?”
“저도 지금 그러고 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누워서 자기 시작했다.
맹목성, 현대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단어이다. 모든 삶의 에너지는 생산성 향상과 자본의 증대를 위해 사용된다. ‘한 가지 일을 갉고 닦는다.’는 뜻의 공부는 입시라는 이름으로 대체됐고 인간과의 목적적 관계는 인맥이라는 이름으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사실상 현대에는 건강, 수면, 외모 등마저 이미 생산성 즉 돈을 벌기 더 쉽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다. 생산성이 우상이 되고 신앙이 되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그 힘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노동의 열매보다 노동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라고 하지만 이제는 노동의 열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졌다.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단편적 쾌락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달리고 있다. 점점 가속화 돼가고 걷거나 중간에 쉬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딘가를 목적으로 해서 달리지는 않는다. 빠르다는 것은 빠르다는 사실 그자체일 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목적지가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인도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는 그의 사업가 친구에게 그가 이미 충분한 돈을 벌었다는 것과 이제 쉬어야 한다는 것을 그 친구 나이 서른에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조금만 더 일을 하고 조금 더 충분히 돈을 번 다음에 쉬겠다고 말했다. 매 십년마다 오쇼는 그 친구에게 쉴 것을 요구 했고 아직 돈이 부족하다는 친구에게 벌 돈의 한도를 정하라는 충고까지 했다. 물론 돈의 한도는 그 한도가 채워질 때마다 올라갔다. 그렇게 일흔이 넘은 사업가 친구는 말했다. “좋아 이제 쉬어야겠어.” 그리고 그것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생산력의 비약적 향상이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는 생산력의 향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숙련된 여공은 1분에 바늘로 5개의 망사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뜨개질 기계는 같은 시간에 3만 개를 만들어 낸다.’라고. 이 계산 대로라면 여공은 기계 앞에서 일분만 일하면 4일을 넘게 쉴 수 있는 것이다.(30000/5=6000 과거의 생산성으로 6000분은 현제의 생산성의 1분과 같다. 6000분은 대략 4일이 훨씬 넘기 때문에 여공의 출퇴근 시간을 모두노동에 포함 시켜도 여공은 공장에서 1분을 일하고 4일의 여가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정말 여가는 증가했는가?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식민지를 개발하고 소비를 장려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물건이 잘 망가지도록 다른 물질을 섞어 제품을 만들었다. 결국 가능한 많은 생산으로 가능한 않은 소비를 일으키는 순환 속에서 자본가들의 주머니와 배는 더욱더 불룩해지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현대사회까지 이어져서 교육, 문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사업 등 지상의 모든 것이 긴밀하게 연결 되서 생산과 소비를 극대화 시키고 있다. 여덟 살짜리 꼬맹이에게 영어 발음을 위해(현대 사회에서 영어는 생산성이다.) 혀 수술(소비)을 하거나, 매년 방송에서 유행하는 옷을 바꾸면서 작년에 유행했던 블랙개열 옷은 입을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다. 방송에서 “올해는 밝은 색 개열의 옷이 유행이네요. 모든 쇼 윈도우와 거리마다 파스텔개열의 노란색과 분홍색이 눈에 뜁니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과연 그 색의 옷이 유행했는가? 우리는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작년에 그렇게 유행하던 “블랙을 입고서는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가? 장담컨대 내년에는 올해 산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사실 현제 진행형으로는 소수의 자본가들의 짜놓은 레퍼토리(repertory)에 따라서 욕망하기 바라는 것(그들의 생산품)을 욕망하고 소수의 부자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불태운다. 물론 그 불태우는 과정하나하나는 부자들의 이익실현에 도움이 돼는 것이다. 우리는 상위 20%의 서울대 진학률과 그 아래 국민들의 서울대 진학률이 16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체 오늘도 열심히 기회의 평등을 부르짖으며 각종 참고서와 문제집을 소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노력하는 것은 나쁜 것인가? 어느 누가 감히 노력을 나쁘다고 하겠는가? 그 노력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그 목적 뒤에는 진정한 노래가 있어야 한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지 죽기 전까지 지옥 속에서 살다가 죽은 뒤에서야 안식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책자에도 나와 있지만 게으름은 미덕이었다. 중세에는 하루에 4시간 이하의 노동과 일 년에 150일 이상의 축제가 있었다. 그때 기독교는 이렇게 가르쳤다. “필요한 돈보다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죄이다. 그들이 필요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뽐내거나 불노소득을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부자들은 어둠속에 숨어서 돈을 세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는 언제 나왔는가? 시장이 된 부지런한 구두닦이 이야기는 언제 나왔는가? 농부에게 농지를 뺏어 빈민으로 만든 뒤 하루에 16시간 노동을 강제로 하는 ‘빈민구제법’이 만들어졌을 때이다. 또 일주일이 칠일이고 칠일에 한번 쉬는 것은 너무 길다고 일주일을 열흘로 만들었을 때이다. 또 그 하루를 쉬기 위해서 16시간을 9일에 나눠서 추가 노동을 했을 때이다. 또 두 살짜리에게 때 묻은 빵조각을 쥐어주고 하루 종일 노동을 시켰을 때이다. 과연 배부르고 행복한건 개미인가 공장을 가진 베짱이인가? 노동자들은 시장이 될 수 있었는가?
게으름은 텅 빈 것이다. 악이 있을 수 없다. 싸우고 경쟁하고 이기려는 마음속에서 악은 활동한다. 이제는 이 목적 없는 전력질주를 멈춰야한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달리기 시합처럼 뛰고 싶을 때 뛰고 싶은 방향으로 뛰고 싶은 만큼 뛰어도 우리의 생산량은 충분하다.(결코 현제의 무한생산 무한소비에 코드에 맞춰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무한 생산 무한소비 체제에서는 언제나 재화의 절대부족 상태만이 유지된다.) 왔던 길과 앞으로 갈 길을 바라보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신은 젊은 어부인가? 노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