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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서평51호/가대人 2010. 2. 18. 19:19
박기산 사회학전공 04
'입시', '취업', '직장생활'에 대한 대학생의 작은 에세이
삶을 사는 여러 가지 갈림길에서 '대학'생인 '우리'는 적어도 저 3가지 이정표를 향해 걸어가고 내다보고 있다. '입시', '취업', '직장생활'.
누구는 내재적 만족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은 외재적 만족을 위해 大學이란 곳에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이 세 가지 이정표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이루려고 하는 도중(道中)이다. 문득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일까?
우리는 이미 ‘경쟁이 내면화' 되어 있다. 그렇기에 연대와 협동을 이루는 방식에 있어서 경쟁의 원리를 무의식적으로 이용하여 쉽게 타인을 규정짓고 남과 나의 경계를 구별할 줄 안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이성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 세계는 평등해 보이고 살기 좋아 보인다.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또 우리는 이미 ‘돈’을 너무나 잘 쓸 줄 안다. 우린 ‘돈의 가치’를 체화한 역사적 주체들이다. ‘돈’이 정치, 사회, 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다. ‘돈’은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유로운 사회적 ‘상상’을 가로막고 ‘대안’을 꿈꾸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길을 향한 이정표를 견고하게 세우고 있다.
그 길에 잠시 지쳐서 돌아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강수돌씨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는 작은 책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차분히 정리하고 내일의 희망을 다른 방향에서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앞으로 걸어갈 배경은 어떠할지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현실은 우리에게 소위 ‘먹고사니즘’을 바탕에 둔 ‘인턴시대’에 ‘스펙쌓기’놀이를 강요한다. 그 현실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세계화’의 가치를 추구하는 초국적 자본주의 기업의 잘 뽑지도 않는 신입사원 1차 서류면접에 필요한 개인이력서에 기입할 몇 줄이다. 그 몇 줄의 능력과 경력을 실어 넣기 위해 매년 20만씩 누적되는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서로를 죽이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실은 이렇게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노동’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한다. ‘취업’의 경쟁은 ‘노동력’의 경쟁이다. ‘노동’의 개념 안에 자본의 경쟁 원리를 체화시킨다.
‘한국인은 부지런하다.’라는 말. 세계 최고의 장시간 노동조건을 가진 나라에서 다시금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국의 근대성장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압축적인 고도성장은 ‘노동시간의 강화’ ‘노동강도의 강화’에 따른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역사였다. 이러한 조건으로 성장한 초국적 자본주의 기업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생산성(productivity)의 극대화이다. 지극히 ‘돈벌이’ 관점에서 우리를 평가하고 체크하고 아니면 쓰레기통에 ‘개인의 역사’이력을 손쉽게 던져버린다. 그들이 내버린 ‘개인의 정체성’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생동하는 연대’에 대한 대학생의 작은 에세이
프랑스의 2006년도 거리는 중학생과 고등학생 이후에 노동자들까지 200만명이 넘는 이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크리넥스 티슈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총리가 처음 취업한 26세 미만 젊은이들에 한해서 최초 2년의 채용기간 동안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한 '최초고용계약법(CPE)'을 밀어 붙이자 이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우리’도 나왔다. ‘2008년의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이하 ‘2008년 촛불집회’)는 5월 2일 저녁 7시 서울의 청계광장에서 여중생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이후 전국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촛불을 들고 ‘광장’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100여일의 여정 속에서 평화적으로 반민주적 정책을 강행한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이 두 운동의 시발점에서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 ‘생동하는 연대’라는 것은 내가 사는 생활 속에서 그 뿌리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때 함께 움직인다.
2009년 4월 30일. 메이데이 전야제 장소는 건국대학교 운동장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냉대했다. 건국대학교 후문에 걸린 ‘우리들은 당신들을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이라는 현수막으로 존재를 밝히지 않은 침잠한 냉대 속에 후문 뒷길에서 우리들의 연대지향적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큰 공부(大學)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이미 ‘감성’조차 보수화 되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에서 소통과 연대를 꿈꿀 수 있을까. 이를 통한 ‘삶의 질’의 관점에 따른 사회구조적인 변화, 생태학적인 새로운 체제전복을 꿈꾸는 것만이 훗날 삭막한 SF의 시대로 나아가는 현실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인가. 우리는 우리를 구별 짓고 있다. 하나는 경쟁의 관점에서 하나는 연대의 관점으로 서로를 구별 짓는 우리는 ‘대학’생이다.
‘세계자본’이 선전하는 개발주의, 성장주의, 소비주의, 물질주의 등을 내면화하고 중독된 결과, 이러한 파괴의 물결에 직간접으로 동참하고 있다. 현실이기에 체화된 우리는 서로를 원망하고 물고 늘어지는 싸움을 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의 지배논리를 강화하는 경쟁이다. 이러한 ‘이중역할’을 강요한 자들은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논리를 이용하는 기득권자들이다. 이를 통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비단 노동자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회예비생’인 우리들에게 내면화 시켜주고 있다. ‘경쟁력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근본 원리로 하는 구조조정이 2009년 4월 30일 메이데이 전야제 때 보여준 ‘자기 검열’과 ‘자기 배신’ ‘자기 소외’의 현수막으로 둔갑했다. 이를 등 뒤에 두고 밤을 지새운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사회적 책임은 ‘우리’의 자기정체성 찾기다.
강수돌씨는 이 책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CSR)’은 단순한 이윤의 사회 환원이 아니라 ‘기업 활동 전 과정에서의 자기책임성(self-responsibility)’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기업에만 한정지어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기업은 자본의 관료 조직화된 구성체이기 때문에 자기책임성의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기업 안의 지위와 역할에 한정을 두고 그 책임을 묻을 공산이 크다. 차라리 그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구성원의 책임성을 묻는 과정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지름길로 여겨진다.
자본주의 기업은 ‘자본주의 생산성’을 근본적으로 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구가 우리 삶의 질을 높여 주리라 생각한다. 삶과 질의 관점에서 ‘기업’을 ‘일터’로 변화해서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생산성은 ‘파괴성’을 뜻하게 된다. 그 근간을 이루는 ‘경쟁과 지배’는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경쟁을 내세우면 그 경쟁 저변에는 기득권자의 시각이 존재하고 지배를 내세우면 그 지배 저변에 경쟁논리가 작용하게 된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사실 ‘임금상승’과 ‘삶의 질’ 사이에는 아무런 개연성도 없다. 우리는 그 ‘불편한 진실’을 실천하고 있다. ‘자기책임성’ 없는 우리의 태도들이 만들어 낸 산물로 인하여.
일터는 ‘원탁형 질서’로 되어야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국제적인 ‘한국산(Made in Korea)’ 대신 범지구적인 ‘삼성(Made by SAMSUNG)’을 강조하는 시대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우애와 환대의 정신을 갖는 것은 왜 이러한 질서 속에 포함되지 않는가. 우리는 마찬가지로 ‘자기정체성’을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두지 않고 서로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로 발전되어야 한다. 대학생인 우리는 ‘개인’의 대학생으로서 지금까지 취업에 대한 경쟁자로만 보고 있지 않았는가. 서로 간의 공유가 없어 결국 너무 쉽게 ‘세계자본’에 의지하여 자신을 구성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공동체(Community)란 서로(com) 선물(munus)을 나누는 관계이고 그 상호작용의 가장 찬란한 꽃이 ‘우정’이라고 말한 강수돌씨의 정신적 지주, 이반 일리치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렇기에 나는 실천하련다. ‘헛살지’ 않기 위하여,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차분히 옆 학우와 함께 사과 나무 한 그루 심는 심정으로..'51호 > 가대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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