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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항상 투쟁이었다78호(2021)/시나브로 2021. 6. 1. 18:51
최희원 수습위원
ⓒ Mnet “생각이 많으면 여유로운 거구나. 그럼 생각 없을 정도로 더 달려야지.”
-<달리는 사이> 청하
지난 12월 9일, 방송사 Mnet에서 기획한 프로그램 <달리는 사이>는 20대 여성 아이돌들이 러닝 크루가 되어 국내의 아름다운 러닝 코스를 찾아 달리는 런트립(RUN-TRIP)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인생과 달리기는 닮았다’라는 주제 아래 진행된 프로그램에서 아티스트 청하는 자신의 번아웃과 우울함에 대해 털어놓았다. 여유를 가지는 것마저 사치 같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번아웃을 자각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청하의 모습은 현대인들의 표상이다. 우리는 숨 가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탈진 증후군’이라 불리는 ‘번아웃’은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스며든다. 푹 젖어 무거워진 옷이 발목을 잡아도, ‘게으름’을 경계하며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달린다. 우리는 왜 ‘지쳤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스스로를 좀먹는 것
tvN 드라마 ‘미생’은 “버텨라.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그러나 ‘미생’에서 등장하는 사회인들은 마냥 긍정적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포기하고, 마음이 꺾이고, 난관에 부딪힌다. 현대인들도 이런 과정을 겪으며 ‘정신적 탈진’을 경험한다.
사람이 지치고 소진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 또는 상태를 ‘번아웃’이라 한다. 번아웃이라는 단어는 1974년 미국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의 『상담사들의 소진』에서 처음 등장했다. 단어의 기원은 꽤 오래전이지만, 번아웃이라는 용어를 미디어에서 다루는 빈도가 급격하게 높아진 것은 최근이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많은 압박과 탈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1 또한 직장인 중심으로 나타나던 번아웃 현상은 어느 순간부터 대학생 집단에서도 빈번히 관찰되고 있다. 서울 소재 대학에서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 대학생 전체 응답자 중 28%가 번아웃 증후군 의심 대상자로 분류됐다. 2 이는 대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할당량’으로 인해 소모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우리는 신체적 탈진상태를 방치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신적 탈진의 경우 이를 하나의 위험신호로 보는 것이 아닌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 만연해있다. 그러나 번아웃은 엄연한 질병이다. 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국제질병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이하 ICD)에 추가했다. 정신력의 문제로 치부되었던 번아웃이 건강에 영향을 주는 의학적인 요소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번아웃이 더 이상 개인의 의지로만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4
의심의 근원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의 안주연 저자는 “주변 상황과 여건에 따라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나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현대사회.”라고 언급했다. 성과를 얻어내는 과정에는 다양한 사회적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이 결과를 도출하는 전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모든 책임과 무게감이 개인에게 집중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여러 정체성을 취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기를 요구받는다. 대학생인 우리의 예시를 들어보자. 우리는 가정에서 자녀일 수 있고 누군가의 형제자매, 혹은 그 외의 가족 구성원일 수도 있다. 학교에 오면 특정 수업을 듣는 학생이고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동료가 되기도 한다. 청년들은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것을 요구받으며 그러지 못할 경우 타인과의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체제가 가져온 압박은 구성원들이 더욱 ‘노력’할 것을 강요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나태한 이’라고 낙인찍는다. 이런 사회적 풍토에서 사람들은 탈진상태에 빠지기 쉽다. 5
잠시 숨을 돌리는 방법
번아웃의 원인에는 여러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효능감¹의 결여’이다. 효능감의 결여를 해소하기 위해선 상황과 사고를 분리해야 한다. 즉, 실패 상황의 발생이 본인의 부족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개인이 전체적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에서 각자의 노력 여부와 그 정도를 의심하는 사고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자. ‘이것이 과연 노력의 부족인가. 외적인 요인이 있었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과정은 자신의 상황에서 한 발짝 떨어져 스스로를 돌보는 과정이다. 6
또한 번아웃에 빠진 사람들에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자아 성찰은 필요하나 자기 검열은 경계하라’고 말한다. 자아는 관찰자아(observing ego)와 경험자아(experiencing ego)로 나뉜다. 자기 검열은 관찰자아의 비중이 매우 높아졌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평가를 하는 관찰 자아에 너무 많은 힘을 쏟으면 새로운 일을 수행하는 경험자아가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줄어든다. 결과가 좋지 못했을 때 어느 부분에서 실수가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과거 회상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동은 지양해야 한다. 7
¹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을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 또는 기대감.
ⓒ Mnet 또한, 현대 사회가 주는 중압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현상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티스트 청하는 번아웃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주변에게 토로했을 당시, “너 되게 시간이 많은가보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과도한 중압을 주는 비난은 사회가 아닌 개인을 향한다. 그러나 번아웃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번아웃을 번아웃이라 부르지 못 하는 것은 노력하는 개인이 아닌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오류가 있음을 시사한다. 안주연 저자는 ‘사회가 규정한 잘못된 명제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챙길 것’을 강조했다.
“지금이라도 우리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방전이 되어 모든 걸 놔버릴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 안주연,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 건강의 척도는 아니다.”
-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개인의 주장을 펼치기 어려운 환경에서 용기와 의견을 묵살당하는 어려움. 수직적인 관계로 가중되는 심리적 압박. 성과 위주의 시스템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경험. 당신은 이 모든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우리는 탈진 중독에 걸린 사회에 물들어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고 피로에 저항하고 있다. 피로에 적응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각자 본인에게 맞는 속도가 있음에도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어 가면 곧 소진의 지름길로 빠지게 된다.
<달리는 사이>에서 아티스트 청하의 ‘달리는 것을 멈추면 내가 그 경기장에서 퇴장해야 할 것 같았다.’라는 말과, 아티스트 하니의 ‘달리는 행위 자체에 강박이 생겨 멈출 수 없었다.’는 말은 주변과 자신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나아가기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항상 투쟁이었다. 열심히 싸워온 자신을 스스로가 돌보지 않는다면 그 누가 지켜줄 수 있을까? 병든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닌, 병든 사회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자.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Mnet
- 1. Herbert J. Freudenberger, "Staff Burn-Out", The society for the psychological Study of Social issues, 1974, pp159-165. [본문으로]
- 2. 안주연,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창비, 2020, p17. [본문으로]
- 3. 김태정, 장형심, “그릿을 높이고 번아웃을 낮추는 대학생 긍정심리의 강점”, 사회과학연구, 31(4), p28. [본문으로]
- 4. 안주연,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창비, 2020, p19. [본문으로]
- 5. 안주연,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창비, 2020, p21. [본문으로]
- 6. 안주연,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창비, 2020, p33. [본문으로]
- 7. Jane Simon, “The Observing Self: A Tool Essential to Save Ourselves and Our Planet.”, 2017. 12. 6, https://www.huffpost.com/entry/the-observing-self-a-tool_b_6199126, 마지막 검색일 : 2021년 4월 29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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