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6일 오전 도쿄 치요다 구의 도쿄지방재판소. 황궁, 국회, 외무성 바로 옆에 위치해서일까. 전날 재판소가 위치한 카스미가세키*1 지역을 산책하며 둘러봤던 재판소는 고요했다. 그러나 다음 날의 분위기는 유독 달랐다. 재판소 앞은 제법 소란스러웠다. 재판을 방청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은 입구부터 긴 줄을 만들었다. 한일 양국의 취재진들이 방송카메라를 설치하고 마이크를 점검했다. 그날은 바로 우에무라 다카시 교수(가톨릭대학교 학부대학 초빙교수 · 주간금요일 발행인, 이하 우에무라)가 니시오카 쓰토무(전도쿄기독교대학 교수, 이하 니시오카)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 1심의 판결이 나오는 날이었다.
“재판 이길 것 같습니까?” 주간금요일*2 사무실에서 재판소로 향하는 택시 안, 긴장을 풀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우에무라 교수는 내 질문에 잠시 옅은 미소를 짓다가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자네, 이 구역이 도쿄의 중심이라네.”
우에무라 교수는 변호사단 최종 회의를 위해 접견실로 들어갔다. 여름 도쿄의 어마어마한 습도만큼 방청객들의 열기도 대단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 많았다. 재판정 좌석 수보다 방청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추첨을 통해야만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재판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도쿄까지 온 나의 ‘뽑기’는 다행히도 불운을 피했고, 입장이 시작되었다.
우에무라 교수 옆과 뒤로 약 20여 명의 변호사가 자리에 앉았다. 맞은 편 니시오카 측에는 대여섯 명의 변호사들이 자리했다. 피고 니시오카는 출석하지 않았다. 재판장이 들어오자 재판정 내 모두가 일동 기립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젊은 재판장은 판결문을 낭독했다.
“우에무라 씨의 손해배상 소송을 기각한다.”
“우에무라 씨가 의도적으로 기사를 날조했다는 니시오카의 주장은 명예훼손으로 볼 수 있지만, 피고 측 주장에 공익의 목적이 있는 만큼 논평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우에무라 씨는 김학순 씨가 기생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굳이 기사에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니시오카의 주장은 진실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
“위안부라는 것은 공창제로 매춘을 한 사람들이다. ”*3
내 옆자리에서 판결문을 메모하던 마시코 미도리(우에무라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모임 차장)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김학순 할머니와 ‘기생 학교’가 언급되는 순간 메모하던 그녀의 손이 잠시 떨렸다. 니시오카 등 일본 내 우익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기생들이 자발적으로 매춘 행위를 했으며 이들이 위안부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망언’을 판사가 그대로 판결문에 인정한 것이다. 판사가 판결문을 다 읽자 도쿄에서의 1심은 끝이 났다. 삿포로 1심*4 패소*5 이후 두 번째 부당판결이다. 2015년 1월 9일, 우에무라 교수가 니시오카와 그의 글을 게재한 <주간문춘>을 발행하는 문예춘추를 제소한 지 꼬박 4년 반 만이다. 엄숙하던 재판정은 판사가 퇴장하자마자 술렁였다. “이것은 부당판결이다!”, “원래 판사는 어디에 간 거야! 비겁하게 숨은 것이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에무라 교수는 왜 명예훼손 소송을 시작했을까. 그의 재판에 무슨 의미가 있기에 ‘부당판결’에 수많은 시민들이 분노했는가.
출처 : 우에무라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모임출처 : 우에무라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모임1991년 서울 - 오사카
위안부 증언 첫 보도
출처 : <성심>
1991년 8월 11일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판. 서울 지국 발 기사 하나가 사회면 ‘톱’으로 실렸다. 그 기사의 파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 =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 전 조선인 종군위안부 / 전후 반세기 만에 무거운 입을 열다 / 한국 단체*6가 청취조사’
일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연행돼 일본 군인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강요당한 ‘조선인 종군위안부’ 가운데 1명이 서울 시내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윤정옥*7 공동대표)가 증언 청취 작업을 시작했다. 동 협의회는 10일 여성의 사연을 녹음한 테이프를 <아사히신문> 기자에게 공개했다. 테이프 안의 여성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끼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숨겨오기만 했던 그녀들의 무거운 입이 전후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지난 끝에 겨우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하 생략)
이 기사는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어느 언론보다 빠르게 반영한 우에무라 당시 오사카 사회부 기자의 ‘특종’이었다. 평소 한국에 관심이 많던 우에무라 기자는 1990년부터 서울과 오사카를 오가며 위안부 문제를 취재했다. 90년 당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만나기 위한 2주간의 한국 취재는 ‘허탕’이었지만, 정대협의 윤정옥 대표를 알게 되었다. 1년 뒤인 1991년 8월 10일, 우에무라 기자는 위안부 증언을 채록하던 윤정옥 대표를 통해 ‘테이프’ 하나를 듣게 된다. 바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었다. 테이프가 역사적 자료임을 직감한 우에무라는 해당 내용을 기사로 써서 오사카로 송고했다.
3일 뒤, 녹취 테이프의 주인공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실명을 밝히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학순 할머니의 실명 공개증언으로 용기를 얻은 전국 각지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하나 둘 씩 자신을 공개했다. 그동안의 전쟁범죄, 여성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사회적 억압 속 입 밖으로 쉬이 낼 수 없던 위안부 문제가 드디어 수면 위에 올라왔다.
공론화된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주요 의제로 급부상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일본 정부를 도쿄지방법원*8에 제소했다. 뒤늦게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일본 내각관방장관은 ‘위안부’에 대해 일본군의 강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을 표명했다(고노 담화, 전문은 참고자료 2번 참조).
1997년부터 현재진행형, 일본 전역
우익들의 표적과 이어지는 공격
고노 담화 발표 이후에도 일본 사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덮으려는 세력들이 등장했다. 사회에는 ‘우익’들이, 정치권에서는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본색들 드러냈다.
특히 1997년 우익 세력들이 발족한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자민당 의원들이 주축이 된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하 일본의 역사교육 모임)’의 탄생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현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인 아베 신조는 ‘일본의 역사교육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들은 고노 담화가 반영된 교과서를 퇴출하고,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등 일본의 전쟁범죄를 뺀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를 덮고 수정하려는 움직임에 정치권이 비호하자 우익 성향의 시민들도 호응했다. ‘행동대장’ 역할을 한 이들은 도쿄 곳곳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며 헤이트 스피치를 이어갔다. 고노 담화가 기재된 교과서 출판사에 테러 전화를 걸며 협박했다.*9*10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11 일본의 대입시험인 ‘센터시험’에 근현대사는 매우 드물게 출제되며, 일본 역사 교과서에 근현대사 부분이 경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 대학생 이노마타 슈헤이(도카이대학교)는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고노 담화를 보지 못했고, 침략 역사 또한 학교 교과서에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은 위안부 문제나 아시아 침략 역사를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일본의 우경화는 사회 곳곳으로 퍼졌다. 히로시마대학에서 한국인 교수인 최진석 부교수가 수업 시간에 위안부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끝나지 않은 전쟁’을 수업 시간에 상영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파면하라는 우익들의 협박이 빗발쳤다.
우익들의 표적은 우에무라를 향했다.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매국노’라는 이유였다. 공격은 집요했다. <산케이신문>의 아비루 루이 편집위원은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가 실제로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된 것처럼 기사를 거짓으로 작성했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니시오카 역시 주간지 기사들을 통해 우에무라의 보도가 ‘날조기사’라고 비방했다.
우에무라 공격은 우에무라 교수의 진로마저 방해했다. 기자 생활 이후,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꿈이었던 우에무라는 효고 현의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에 채용돼 전임교수 고용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우익 주간지 <주간문춘>이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아가씨 여자대학 교수로’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기사 게재 직후부터 우에무라의 해임을 요구하는 이메일, 전화, 팩스 등이 대학에쇄도했다. 결국 부담을 이기지 못한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은 고용계약서를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에무라 채용을 취소했다.
이미 대학 채용을 전제로 아사히신문에 신청한 조기 퇴직마저 승인되었기에 우에무라는 ‘붕 뜨게’ 되었다. 그는 가톨릭대의 자매대학이기도 한 홋카이도의 ‘호쿠세이학원대학’의 비상근강사로 근무하며 가톨릭대 교환학생 등 한국 유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마저 해마다 ‘매국노 우에무라와 재계약 하지 말라’는 전화와 메일과 팩스가 폭주했다. 삿포로에 거주하던 고등학생 딸에게까지도 신상을 공개하며 살해 협박을 가해졌다. <아사히신문>이 위안부 문제 검증 기사에서 우에무라의 기사에 대해 “사실을 왜곡한 것이 없다”고 날조를 부정했으나, 우익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우에무라는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날조 기자라는 딱지를 붙인 니시오카를 상대로 도쿄에서, 사쿠라이 요시코(이하 사쿠라이)를 상대로 삿포로에서 명예훼손 소송을 시작했다.
2015년부터 도쿄와 삿포로
투쟁,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만의 싸움이 아니다. 역사를 바꾸려는 자와 기억하려는 자의 싸움이다.”라는 우에무라의 투쟁에 일본 안에서도 많은 호응이 시작되었다. 특히 기자들은 우익들의 우에무라 공격에 가장 많은 분노를 표현했다. 우에무라에 대한 공격을 초기부터 취재하는 도코쓰미 요시후미 <홋카이도신문> 기자는 “우에무라 옹호 같은 위안부 기사를 쓰면 ‘출세하기 힘들다’라는 소극적인 분위기가 언론계에서 팽배하지만, 진실된 기사를 쓴 우에무라를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일본에는 한국의 언론민주화운동 같은 투쟁의 역사가 없고, 이러한 매체들로 세상을 보는 일본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한다고 비판했다. 양심적인 일본 언론인들의 연대는 일본신문노동조합연합이나 일본저널리스트회의, 일본민간방송노동조합연합회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변호사들 역시 우에무라를 비롯한 올바른역사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든든한 지원단이다. 삿포로 1심 재판의 변호인단은 107명, 도쿄 1심 재판의 변호인단은 170명에 달한다.이들은 우에무라 재판을 변호하며 ‘일본 사법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다. 삿포로 변호사 지원단의 사무국장을 맡은 오노데라 노부카츠 변호사는 재판에 참여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 재판은 우에무라 씨만의 재판이 아니다. 일본 민주주의가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이 재판을 위해 인권, 기업, 송무, 가사 등 관심분야가 달랐던 여러 변호사들이 ‘일본 민주주의 수호’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갖고 뭉치게 되었다. 이들은 “도쿄와 삿포로 1심은 법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판결이고, 항소심에서 결과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들을 확보했다”며 승리를 자신했다.
우에무라의 투쟁 자체가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에 맞서는 기록’이라며 동행하는 카메라맨도 있다. 바로 니시지마 신지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실제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당시 서울에서 ‘RKB 마이니치방송’ 특파원을 했던 니시지마 감독은 “왜 우에무라 씨가 우익들의 ‘표적’이 되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정확한 역사를 보도한 우에무라에 대한 공격은 문제가 있고,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니시지마 감독은 우에무라 취재에 대한 압력이 들어오자 RKB 마이니치방송을 사직하고 프리랜서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다. 완성된 다큐멘터리는 ‘표적’이라는 제목으로 내년 5월 도쿄에서의 상영을 목표로 한다. 가톨릭대학교에서도 ‘표적’을 학내에서 상영 및 감독과의 초청 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모임이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우에무라는 함께하는 시민들의 힘을 보며 재판을 준비하는 힘을 낸다고 한다. 특히 삿포로에서의 1심 패배 뒤, 마시코 미도리 씨의 어머니가 했던 말을 언제나 떠올리며 용기를 얻는다.
“이 재판, 지길 잘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다고 생각될 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우에무라 선생님과 가족들의 고통에 미안하지만, 만약 재판을 이겼다면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 이후 더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응원하고 있고, 이것은 이상하고 부당한 공격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라는 신의 계시인 것이 아닌가.”
우에무라 교수와 도코쓰미 기자는 재판 자료를 찾기 위해 시코쿠의 가가와를 찾았다. 위안부 문제의 전문가인 저널리스트 우스키 케이코 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별안간 우스키 씨 자택에서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었다. 바로 우에무라의 취재에 사용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테이프였다. 지금까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우에무라의 기사 등 글로만 남아있지 육성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기생학교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누락했다.”라는 니시오카의 주장에 핵심적인 반론이 되며 1심 재판장의 판결문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재판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다.
오래된 음성 테이프 파일이라 잡음이 심하고, 북간도 출생에 평양에서 생활했던 김학순 할머니의 이국적인 억양과 낯선 단어의 파악이 쉽지 않아 녹취 해제는 일단 한국으로 넘겨졌다. 결국 서울에서 필자에 의해 꼬박 3일이 걸려 이루어졌다. 윤정옥 대표와의 인터뷰 내용을 합쳐 장장 3시간에 이르는 파일 안에 ‘기생학교’의 언급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니시오카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해당 테이프의 번역본은 한-일 전문 번역가 요네즈 토쿠미 씨의 손을 거쳐 재판의 증거로 채택되었다.
변호사단과 우에무라는 이를 항소심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활용할 예정이다. 우에무라는 취재 상대가 말하지 않은 사실을 당연히 기사에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조라는 주장 자체가 ‘날조’였다.
삿포로 변호사단 역시 사쿠라이 재판을 뒤집을 증거를 발견했다. 바로 사쿠라이가 1992년 <주간시사>에 기고한 글*12이다. 이 글에서 사쿠라이는 우에무라와 동일한 논조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았다. 현재 사쿠라이의 입장과 정반대인 것이다. 사쿠라이의 주장을 사쿠라이의 주장으로 반박할 수 있는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2019년 가을, 역곡
우에무라 교수 “진실은 거짓을 이긴다.”
가톨릭대학교 도서관 내 연구실에서 만난 우에무라 교수는 정말 분주했다. 가톨릭대 수업 준비, 재판 준비, 주간금요일 업무, 칼럼 기고, 강연 준비 등 할 일이 산더미다. 정돈되지 않은 서류 뭉치들은 삿포로와 도쿄, 서울을 오가는 우에무라 교수의 바쁜 투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에무라 교수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물론 그는 자신을 향한 부당한 공격에 큰 고통을 느꼈다. 특히 삿포로 1심에서의 패소는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게 되었다.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개헌을 통해 일본을 바꾸려는 움직임에 큰 우려를 느끼며 이에 최전선에서 맞서는 자신의 투쟁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일본 민주주의 파괴 움직임을 막으라는 지령입니다. 고독하고 힘들었지만, 나 자신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에무라 교수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가톨릭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도 맹목적이다.’ 독일의 전 대통령 바이츠체커의 명언을 인용했다.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 교수’로서 일본이 진심으로 과거를 반성해야 한반도와 중국 등 동북아 국가들과 진정한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에무라 교수의 연구실 입구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적혀 있다. 바로 ‘희망’이다.
군사정권 시대 언론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신홍범 전 <한겨레> 논설주간은 삿포로 항소심 보고집회에서 우에무라 투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저는 우에무라 기자의 투쟁과 이를 돕는 일본 시민들을 보면서 ‘드레퓌스 사건’이 떠오릅니다. 끝까지 싸워 진실을 밝히면, 언젠가는 일본도 여러분들을 고마워할 날이 올 겁니다. 위안부 역사는 한국과 일본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에 이를 지켜야만 합니다.”
출처 : <성심>
참고자료 1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주요내용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자랐다. 일본군에 속아서 중국 위안소로 끌려갔다. 끌려간 곳은 중국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소였다. 이곳에는 총 5명의 조선 여성들이 있었으나 모두 ‘에미코’, ‘아이코’ 등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위안소에 끌려가자마자 일본군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일본 군인들은 자주 술에 취했으며 이들에 의해 신체적인 폭행 및 학대 또한 이어졌다. 부대가 이동할 때 마다 위안부 여성들도 함께 이동했다. 어느 날, 감시가 약한 틈을 타 조선 출신 보따리상을 통해 부대를 탈출했다.
참고자료 2 고노 담화*13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으나,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되었으므로 발표하기로 하였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또한 광범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어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또한,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조선반도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하여졌다. 결국, 본건은 당시 군의 관여 하에서,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금 그 출신지의 여하를 묻지 않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또한, 그런 마음을 우리 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식견 있는 자들의 의견 등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해 가고 싶다. 우리는,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며,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금 표명한다. 또한, 본 문제에 대해서는, 본국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있으며, 또한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모여 있으며, 정부로서도, 앞으로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 가고 싶다.
참고자료 3
도쿄 1심 판결 이후 우에무라 성명서 주요내용 요약 도쿄 지방법원의 하라 카츠야 재판장이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나의 기사를 ‘날조’라고 하는 니시오카 씨의 주장과 주간문춘 기사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을 인정했다. 하지만 ‘진실상당성’을 근거로 니시오카 씨를 면책했다. 니시오카 씨는 나에게 취재도 하지 않고 나를 ‘날조’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모순임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법원은 니시오카 씨가 쓴 기사의 책임을 덮었다. 이런 판결이 확정된다면, 어떠한 가짜 뉴스도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다. 매우 위험한 사법 판단이며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지난해 11월, 니시오카 씨와 함께 나의 기사를 날조라고 주장한 사쿠라이 씨의 책임을 면제하는 판결 역시 삿포로에서 내려졌다. 언론인으로서 당당히 투쟁을 계속하겠다. (2019년 6월 26일,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주간금요일 발행인,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도쿄 1심 판결 이후 변호사단 성명서 주요내용 오늘 도쿄지방법원 민사 제32부 하라 카츠야 재판장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본 판결은 니시오카 씨의 ‘날조’라는 표현이 사실 적시임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우에무라의 명예훼손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판결은 니시오카 씨가 의도적으로 취재원의 기생 경력을 기재하지 않았다는 것 등 ‘추론으로 인한 일정한 합리성이 있다’며 상당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확립된 판례에 의하면 면책이 되기 위해서는 보도된 사실을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 및 자료가 필요하다. 본 판결에는 그러한 근거와 자료가 없다. 또한 김학순 씨는 스스로 “나는 정신대였다”고 말한 바 있으며, 속아서 중국으로 갔고, 이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이었음을 밝혔다. 법원의 판결은 종군 위안부 제도 피해자의 존엄을 짓밟는 것이다. 우리 변호인단은 김학순 씨가 기생학교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 니시오카 씨의 차별적 담론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오늘의 판결은 변호인단의 입증을 일고의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것이며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었다”는 현 정권의 자세에 아부하는 정치적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예단에 기초한 판결이며, 현대 사법의 근본 원칙을 짓밟은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오늘의 판결은 정권과 유착한 지독한 부당판결이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변호인단은 부당 판결에 즉시 항소하며,우에무라 씨의 명예를 회복하고, 위안부 제도의 모든 피해자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으로 싸울 것이다. (2019년 6월 26일 우에무라 소송 변호사단)
<각주>
*1 도쿄 도 치요다 구 남부에 있는 일본 관청지구
*2 1993년 창간한 일본의 진보적인시사주간지로 기업광고 없이 운영되는 독립언론이다.
*3 니시오카 쓰토무와 사쿠라이 요시코 등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위안부의 강제연행을 부정하고, 자발적으로 매춘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4 2015년 2월 10일, 우에무라 교수는 <주간신조>, <WILL>, <주간다이아몬드>에 ‘우에무라는 날조 기자이며, 이런 사람은 대학 교원의 자격이 없다’고 한 사쿠라이 요시코를 상대로 삿포로에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5 2018년 11월 9일, 삿포로지방재판소는 1심에서 우에무라 교수의 제소를 기각했다. 사쿠라이의 글을 보았을 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진실상당성’과 ‘공익성이 있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노데라 노부카츠 변호사(우에무라 재판 지원 삿포로 변호사 사무국장)는 도쿄 1심과 삿포로 1심의 판결 논리가 비슷하다고 밝혔다.
*6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7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1980년부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며 1990년 1월 <한겨레>에 <정신대 원혼의 발자취 취재기>를 4회에 걸쳐 연재했다.
*8 일본 사법부는 한일협정에 의해 한국의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김학순 할머니의 제소를 비롯한 위안부 관련 제소에 대해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9 히로시마 지역에서 오랜 기간 교사를 역임한 오카하라 미치코 씨는 “출판사들에 대한 거센 항의 속에 역사를 정직하게 기록한 교과서들이 사라져갔다.”고 이야기했다.
*10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는 본인의 취재에서 일본 대형 교과서 회사 ‘니혼쇼세키’의 예를 들며 우익들의 조직적인 항의가 실효성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니혼쇼세키는 1990년 대 까지 도쿄 23구 모두 역사 교과서를 공급했다. 그러나 1997년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출판사는 물론 집필 교수진까지 우파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그 이후 급격히 채택률이 줄어들며 2003년 도산했다.
*11 2016년 효고 현에 위치한 나다 중학교가 위안부 역사를 언급한 ‘함께 배우는 역사’라는 교과서로 수업을 하자, 해당 교과서가 일본 문부성의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익 세력에 의한 조직적인 테러 협박이 이어졌다.
*12 사쿠라이 요시코는 주간지 <주간시사> 1992년 7월 18일 호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에 대해 “강제 징용된 이들의 생생한 호소”라고 표현했다.
*13 담화에 등장하는 정부는 일본 정부, 우리 나라는 일본을 뜻한다.
<참고문헌>
- 도서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2016)』, 우에무라 다카시 저 / 길윤형 옮김, 푸른역사
『일본 우익의 현대사(2019)』, 야스다 고이치 저 / 이재우 옮김, 오월의봄
- 담화
“위안부 관계 조사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1994.8.4)”, 일본 외무성 / 일본어 원문 : https://www.mofa.go.jp/mofaj/area/taisen/kono.html
- 기사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동원 강제성 확인한 ‘고노담화’ 전문, 이세원 기자, 기사작성일 : 2014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