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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는 언제 어디서나 커밍아웃하고 싶다51호/스펙트럼 2010. 2. 18. 19:46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인권팀장 이종걸
금기와 금기 사이
지난해 미국 대선의 승리자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였다. 수많은 동성애자들은 공화당의 맥케인 대신 오바마를 지지했다. 오바마는 선거 유세 연설 중에 ‘동성애자 커플 중 한 명은 병원에서 죽어가고 다른 한 명은 죽어가는 동성애 파트너를 아무런 손을 쓰지도 못하고 지켜만 봐야하는 현실을 뜯어 고치겠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동성애자들의 표를 의식하기도 했을 테고, 동성애자들이 그의 든든한 선거 후원자이기도 하니 당연한 발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불어 살펴야할 점은 미국사회에서 동성애 문제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하나의 잣대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내 메사추세츠주와 코네티컷, 아이오와, 버몬트 주에서는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동성 결혼 문제와 관련하여 동성애자 단체와 반동성애 운동진영 사이의 갈등이 심각하다. 이러한 미국 내 사회를 바라보는 한국 내 시선은 남의 나라 문제 수준으로 취급한다. 최근 미국 미인대회에서도 논란이 된 동성간의 결혼 문제를 현재 우리나라에서 같은 상황에서 미인대회 출전자에게 질문했을 때 반대로 동성결혼을 지지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발언으로 만약 출전자가 1위가 아닌 2위에 올랐다면 미디어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하지만 미래의 한국의 미인대회 출전자들은 아직까지는 안심해도 좋다. 그러한 질문이 나올 시기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동성애 문제를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잣대로 삼기에는 이른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여느 문화상품에 ‘동성애’를 소재로 삼으면 ‘자극적이다.’라는 반응 또는 ‘금기를 열다’ 정도로만 받아들여지지 진지한 사회 문제로 공유하기는 힘들다.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을 고쳐야 할까?우리나라 속 동성애
우리나라에도 동성애자는 존재한다. 2000년 홍석천씨가 커밍아웃 하기 이전에도 동성애자는 거리에 나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동성애자들의 인권단체도 존재했고, 인터넷 상에서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했다. 하지만 ‘커밍아웃, 게이’라는 용어가 한국사회에서 커밍아웃하게 된 계기는 역시 배우 홍석천의 공이 크다. 이후 ‘하리수’라는 트랜스젠더가 등장한다. 여전히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를 혼동하는 여러 어르신들이 존재하지만, 점점 사회분위기는 이런 분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무식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시점이다. 혹시 아직도 모르신다면 공부해야한다. 성적 소수자는 성 정체에 있어서 다수인 이성애자가 아니면서, 또는 자신의 육체적 성별 정체성에 아무런 걱정, 불편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아닌 모든 사람을 일컫는다. 즉 일명 LGBT라는 영어의 이니셜로 일컬어지는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를 포함한다. 이제는 성정체성 문제에 여전히 질문을 갖고 고민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Questoning(질문하고, 고민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도 포함되고, 간성(Intercorse) 즉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함께인 사람도 포함한다. 이 모두를 일컬어 LGBTQI 성소수자로 칭한다. 이 성소수자라는 용어는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극소수에게만 알려진 용어다. 한국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운동이 시작 된지가 15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6색 무지개 - 빨,주,노,초,파,보- 깃발을 노동절 집회나 촛불 집회 등에 여러 번 들고 다녀도 아직도 어디서 나오셨냐고 묻는다. 이는 성소수자 인권운동 내에서의 운동능력 문제도 있겠지만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문화를 소화하는 방식에서 그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게이 퍼레이드는 가장 신나는 축제 중 하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그리고 미국 뉴욕, 샌프란시코의 게이 퍼레이드는 수백만 명의 인원이 참여한다. 혹자는 ‘동성애자가 그렇게 많나?’라고 놀랄지도 물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제 게이퍼레이드는 게이(남성동성애자 뿐만 아니라 여성동성애자를 통틀어 표현함)뿐만 아니라 여러 성소수자를 비롯하여 이성애자들도 퍼레이드를 구경한다. 주인공은 게이지만 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성애자들이다. 한국에서도 2000년 시작한 게이축제가 있다. 올해 10년째를 맞이하는 퀴어문화축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의 의미 안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거리로 나와 자신을 보여주는 것은 당당한 커밍아웃이다. 그렇지만 이러 당당함을 우리 한국사회는 존중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사회는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성소수자의 이미지에만 한정되어 퀴어들을 받아들인다. 배우 홍석천이 커밍아웃 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접했던 성소수자다. 그런데 직접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 브라운관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얼굴로 다가오는 장면은 이성애자뿐만 아니라 성정체성에 고민하던 성소수자들에게도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는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성소수자 스스로에게도 자신을 정체화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과정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유교문화와 가부장제가 확고한 한국사회에서 학교 제도교육이나 사회적인 분위기가 동성애자라는 존재 자체를 암묵적으로 부정하던 것은 오히려 직접적으로 동성애자를 처벌하는 서구유럽의 형벌보다 더 깊숙한 차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섹슈얼리즘의 소재로 전락한 동성애
배우 홍석천의 커밍아웃이후 동성애 소재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는 부쩍 늘었다. 대박은 아니어도 이러한 소재가 영화나 드라마를 소비하는 주체들에게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작년 말에 개봉했던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와 영화 ‘쌍화점’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기획한 영화라 할 수 있다. 20,30대 여성들에게 있어 조각 같은 꽃미남들이 엉켜있는 모습은 또 다른 환상을 자극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는 동성애자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끌어올 수 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제작진들은 영화의 기획단계에서부터 딱 그 지점까지만 다루려고 했을 것이다. 동성애 소재를 다루되 소재는 소재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동성애자들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동성애라는 뭔가 호기심 많은 세계에 간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상에서 주인공들의 성정체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들이 예쁘게 사랑하다가 헤어지다가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며 끝나는 이야기는 꽃미남의 이미지로서만 존재해야 의미를 갖게 되고, 그러한 형태만이 곧 이 문화에 대한 소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산업의 중심에 성소수자는 또 다시 소수자로 남는 것이다. 게이감독들이 제작한 퀴어 영화 ‘후회하지 않아’ 와 ‘소년, 소년을 만나다.’는 남성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다. 물론 이 영화에도 꽃미남들은 존재하고, 20,3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적어도 동성애를 소재만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들 사이의 계급이야기도 존재하고, 풋풋하고 말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동성애자들의 아픈 사랑도 느껴지는 말 그대로 동성애자들의 사랑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한국 내 미디어 산업에서 동성애는 그려지지만 동성애자를 다루는 것은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는 주체가 당당히 묘사되는 것은 그 주체에 대한 힘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 행위에 당위성이 함께 표현된다. 아직 한국의 매체는 이러한 위력을 겁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 드라마의 유행 코드에는 유머감각 있고, 센스 있는 멋진 게이 캐릭터가 존재한다. 미국 유명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와 '윌 앤 그레이스 (Will and Grace)'가 대표적인 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두 시트콤을 통해 한국의 동성애 친구 사귀기는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힘들지도 몰라도 20,30대 여성들의 재미있는 상상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상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성애자 여성들이 동성애자 친구를 사귀려는 의도에는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과 한국사회의 경직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는 누구에게나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일정한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한국 남성들에게 시달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를 재밌게 풀어주어 유머러스하게 해석해주는 게이남성은 시트콤 속의 캐릭터일 뿐이다. 이 여성들에게 동성애자는 사려가 깊고, 감수성이 예민하여 자신과 맞는 ‘진짜’친구이지 동성애자로 존재하지는 않다. 또한 여성주의 입장에서 고려한다면, 남성중심의 한국문화의 ‘단순무식’함 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여성도 아닌 게이라는 여성들이 생각하기에 중성적인 존재들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동성애자는 주체가 아닌 조연으로 연기하는 역할인 것이다. 그리고 남성동성애자라기 보다는 중성적이면서, 무채색의 인간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만약 여성들에게 친구 같은 게이가 남성으로 그려지면 상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린다.금기와 현실 사이
한국사회에서 커밍아웃은 이제 유명한 명사다. 커밍아웃은 또 다른 욕망의 표출이기 때문에 그로인해 얻는 쾌감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다. 남다른 감정이다. 하지만 성소수자는 이 남다른 감정만으로 커밍아웃을 할 수 없다. 성소수자가 커밍아웃을 하면 이를 대하는 상대방과 경계를 지어야한다.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것은 ‘편 가르기’ 문화에 익숙한 한국사회에서 치명적인 외로움을 전달한다. 다른 것이 다른 것으로만 느껴지지 않고, 등을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라 일컬어지는 관용이 아직도 한국 사회는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민족을 주적으로 대치해야하는 현실에서 관용은 배부른 시대정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일순간 진보하고, 갈등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갈등을 갈등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존재하고, 그들이 함께 모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성소수자를 현실의 당당한 주체로서 사회가 인식하지 않는다면, 상상 속의 존재로서만 받아들인다면 커밍아웃은 점점 힘들어진다.
커밍아웃의 의미
커밍아웃은 대사회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첫단계는 자신을 스스로 성소수자라고 인식하는 것부터다. 그 이후 같은 성소수자들과 만남 속에서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주위 친구들과 가족이다. 즉 작은 테두리에서부터 시작하여 필요에 의하면 직장 동료등 사회적으로 넓혀가는 것이다. 이렇게 범위를 점점 넓혀가는 과정에서 수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하는 지난한 과정을 성소수자는 거쳐야한다. 그 과정 속에서 성소수자는 항상 되묻는다. 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상대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달라져야한다. 이성애자들만의 결혼이 인정되는 국가라면, ‘왜 결혼안하세요?’는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왜 연애안하세요?’ 는 지극히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언제나 이성애 중심적이다. 동성애자는 언제 어느 곳에 존재할 수 있다. 이성애자가 다수인 사회에서 동성애자가 커밍아웃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것은 사회의 관용이 부족한 것이고, 아직도 성숙하지 않은 사회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소수자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커밍아웃 하고 싶다. 다만 희망 뉴스로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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