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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읽어주는 남자51호/달콤, 살벌 2010. 2. 18. 19:43
편집위원 오아시스
다크나이트
지금의 세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아니 더 어리거나 혹 더 나이든 사람이라 해도 배트맨이란 캐릭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작년 가을 현기증 나도록 멋진 배트맨 영화, ‘다크나이트’를 접한 지금 그 존재는 명확해지고 또렷해졌다. 다크나이트라는 영화가 몰고온 광풍은 엄청났다.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흥행 성적으로 타이타닉의 역사적인 기록을 넘보더니, 히스레저의 연말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 수상을 비롯 각종 주요 부문 시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무엇보다 필자를 놀라게 한 건 한국에서의 대흥행이었다. 미국식 슈퍼 히어로 무비, 특히 배트맨 시리즈는 한국에서 참패한다는 나름대로의 공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다크나이트가 불러온 400만이란 한국 관객은 다른 어떤 영화보다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거대한 자취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그것은 ‘더 대단한 영화’라는 아쉬움이었다. 이정도 영화라면 ‘더’ 흥행했어야 했다. 이정도 메시지라면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관객들은 ‘더’ 깊은 주의력과 관찰력으로 영화를 읽었어야 했다.
배트맨과 조커 또는 미국과
아프간
영화 ‘다크나이트’의 결과적인 스토리 라인은 간단하다. 배트맨이라는 어둠의 사도 앞에 맥을 못 추던 마피아들은 조커라는 인물을 끌어들여 배트맨을 죽이도록 하고, 조커는 고담시 시민들을 인질로 삼아 배트맨을 유인한다. 이런 술래잡기같은 쫓고 쫓김이 계속되다 모두의 예상대로 배트맨이 조커를 제압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배트맨의 승리 뿐일까? 이 영화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문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 미국 문화는 9.11 전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미국이 그 사건에 대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영화나 소설을 포함한 대중 예술 문화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다크나이트’와 세계관 속에도 9.11의 충격과 그 그림자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조커는 알카에다를 비롯한 ‘테러집단’이다. 개인적 신념에 따라 범죄 자체를 즐기는 모습과 미디어를 통한 협박성 메시지 전달을 하는 모습이 그와 상당히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배트맨은 정당성을 지닌 어떤 집단도 될 수 있고 개인도 될 수 있지만, 테러와 직접적으로 맞닥뜨린다는 점으로 보았을 때 미국 그 자체로 본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럼 감독이 미국과 테러, 이 둘의 상관관계를 두고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살펴보자.
우리들의 윤리와 도덕
영화가 말하는 바를 전달하는 과정은 크게 영상 자체와 대사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다크나이트 영화를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대사 자체에 힘을 실었다. 특히 조커의 대사 속에 많은 의미들을 포함시켰다. 조커는 배트맨과 (또 다른 악당으로 등장하는)투페이스, 즉 하비덴트와 맞닥뜨릴 때 의미있는 말들을 내뱉는다. 극중 하비덴트의 여자친구인 레이첼을 살해하고 하비덴트 또한 중상을 입게 한 조커가 하비덴트를 찾아가 충동하는 장면을 먼저 살펴보자. 조커는 말한다. '뭔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면, 설령 그것이 악이라 할지라도 우매한 시민들은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 어리석은 시장 나으리가 죽으면 시민들은 미칠듯한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 우리는 테러의 악행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전쟁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건 계획된 것이니까. 그 계획 안에서의 살인은 살인이 아니니까. 말하자면, 우리 윤리 범위의 한계란 그것 뿐이다. 이 인간 윤리에 대한 감독에 대한 냉소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니, 다크나이트 작품 자체가 우리 윤리와 신념에 대한 통렬한 비웃음이다. 그것은 배트맨의 계속되는 패배로 입증될 수 있다. 실제로 배트맨과 그가 가진 윤리와 정의는 결국 아무도 구원할 수 없었고, 오히려 조커와 같은 악하고 해로운 인물로 낙인찍힌다. 그 점은 조커의 대사 속에서 다시 그려진다. ‘나는 널 죽이지 않아. 네가 날 완성시키니까. 어차피 시민들이 볼 때는 너나 나나 똑같은 별종이야. 결국엔 그들과 너의 도덕과 방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보게 될거야.’ 그런데 이 대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이, 대사를 하게 한 감독의 심정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았다. 십중팔구 그것은 씁쓸함이었을 것이다. 테러 못지 않은 악으로 치부되는, 테러와 싸우는 자에 대한 안타까움. 즉, 미국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그렇다. 누군가는 테러와 맞서야 한다. 누군가는 그들이 지닌 힘 못지 않게 강한 힘으로 그들을 막아서야 한다. 하지만 시민들에겐 배트맨과 조커 모두 별종일 뿐이다. 아니, 극 중 시민들은 오히려 조커보다 배트맨을 더 열성적으로 미워한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에 대한 전 세계적인 반미시위 등) 그들은 마피아가 조커를 데려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배트맨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 둘은 서로를 완성시킨다. 조커, 즉 테러집단은 배트맨 혹은 미국이라는 집단을 통해 오히려 더 높은 명성과 두려움을 전 세계에 떨친다. ‘악은 선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정의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말이다.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배트맨과 조커의 대립에서 미국과 테러집단의 대립, 그리고 그 속에서 3자들이 지니는 도덕과 윤리의 엉터리를 찾아볼 수 있다면 우린 이 영화가 던지는 수수께끼를 모두 푼 것일까. 배트맨이 미국이라면, 이 영화는 단순히 미국을 대변하기 위한 영화일까. 앞서서는 배트맨을 윤리와 정의에 목매인 인물로 그렸는데, 이를 깨는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배트맨이 핸드폰에 초음파 발신기를 설치해 고담시 모든 사람들을 감청하고 또한 전파를 통해 그 위치나 주변 사물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하는 장면이다. 자, 여기서 감독은 질문을 던진다. ‘결과를 위해 가지는 거대한 권력과 수단,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극 중 이 장치는 분명 놀라운 효과를 보인다. 이를 통해 수많은 인질들을 구출하고, 결국 조커마저도 제압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를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미국이 아프간에 가졌던 광기어린 분노를 되짚어 보았었다. UN의 결의를 무시하고 이라크로 몰고간 전쟁의 광풍. 그것이 당시 많은 정의와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엔 미국의 허풍으로 결론지어졌지만), 과연 그러한 권력이 정당했었냐는 의문이다. 자 그럼 당신에게 다시 질문. ‘결과를 위해 가지는 거대한 권력과 수단,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 ‘배트맨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법 위를 날개짓하는 박쥐 한마리
아직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채 못 내렸는데, 더한 질문을 쏟아내니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배트맨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이어서 할 더 깊은 논의에 대한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살펴보자면, 배트맨의 존재에 대해서는 배트맨 그 자신도 확신을 가지지 못 한다. 극 상황으로 보았을 때는 이미 오랫동안 자신의 망토를 이어받을 사람을 찾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검은 망토를 두르고 법 위에 올라서는 자신의 행위들은 결코 사회 속에서 ‘정의’로 인정받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자신의 신념 속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해 떨어지기 무섭게 수많은 범죄자들을 옥죄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이 과연 이상적이기만 할 수 있을까. ‘법 위에 올라서서 법을 행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라는 말이다. 법에게는 감정도 없고 사회적인 이념도 없다. 그렇기에 법이 사람들 속에 공정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배트맨은, 인간이다. 감정을 가졌고 이념도 가지고 있다. 그가 가진 힘으로 보아 손톱만큼만 그 이상이 엇나가도 그것은 중범죄가 될 게 틀림없다. 때문에 그가 사회 속에서 법이 될 수 없고 법 집행하는 것은 더더욱 인정될 수 없다. 법이 아니기에 위험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법의 이념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법의 이념은 범죄자들의 숨통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 화합과 균형을 꾀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트맨은 어떠한가. 마피아를 비롯한 범죄자들의 숨통을 조이고 조인 나머지 그들이 최강의 적, ‘조커’를 불러오게끔 만들었다. 통해 보자면, 미국이 총을 들면 테러리스트들은 바주카를 들었고, 미국이 바주카를 들면 그들은 9.11테러를 감행한 전력이 있다. 아무튼 극 중 상황에서 조커의 등장은 범죄와 비리, 경찰과 언론이 나름의 균형을 유지했던 이전의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고 때문에 앞서 말한 시민들의 (조커보다 더한)배트맨을 향한 적개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극중 배트맨은 말한다 ‘조커의 행위는 이미 선을 넘었어요.’ 이에 대한 비서, 알프레드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먼저 선을 넘은 것은 주인님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바치는 헌사
조커에 패배한다. 그에게 유일하게 사랑하는 ‘레이첼’을 잃고, 뒤이을 희망인 ‘하비 덴트’를 빼앗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의에 매달려 조커를 죽이지도 못한다. 단순히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뇌할 뿐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존재는 더욱 왜곡되고 악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희망이다. 힘들지만 서로를 믿고 조커의 원하는 대로 상대편 배를 폭파시키지 않은, 시민들 본성에 대한 희망이다. 그렇다. 조커는 그것을 쓰레기같은 자기 정의와 엉터리 윤리라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그들 스스로를 구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읽었던 부분은 엔딩이었다. 그가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추격을 받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을 때 흘러나오는 대사들, 누군가를 위해 바치는 헌사들.
‘그들에게 필요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에 추격을 받는 거야. 그는 감당할 수 있어. 영웅이 아니니까. 그는 침묵의 수호자요, 우릴 지켜보는 보호자. 그는 어둠의 기사야.’'51호 > 달콤, 살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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