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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자본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면53호/악마의 맷돌 2010. 6. 11. 16:13
심석태 SBS 보도본부 차장, 법학박사
논의의 출발…언론도 ‘기업’이라는 현실
언론과 자본의 문제를 살펴보는 글은 숫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솔직할 것 같다. 한국일보 직원의 수는 1999년 932명에서 2008년에는 360명으로 줄었다. 세계일보는 448명에서 221명, 국민일보는 523명에서 350명으로 줄었고, 조선일보도 871명에서 592명으로, 한겨레는 667명에서 515명, 중앙일보는 667명에서 515명으로 줄었다. 10개 전국종합신문 전체는 6,173명으로 1사당 평균 617명에서 전체 4,808명, 1사당 평균 481명으로 줄었다.
물론 직원이 증가했거나 변화가 거의 없는 곳도 일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언론재단, 『2008년 언론 경영성과 분석』, 2008. 12. p.28.
이런 숫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느낌이 오는가? 사실 필자는 숫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더욱 사람을 숫자로 치환하는 건 매우 싫어한다. 하지만 숫자들이 때로는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 이 숫자들이 얼마나 실감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1991년부터 기자로 일하면서, 주변에서 많은 기자들이 현장을 떠나고 회사를 옮기는 것을 지켜본 필자에게는 숫자가 그냥 숫자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경영 상황이 안정된 방송사에 근무하고 있지만 역시 외환위기 당시 동료들이 떠밀려서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물론 언론만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던 셈이다.
더 적나라한 숫자도 있다. 금감원이 공시한 신문사 전체의 당기순이익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대규모 적자 시대를 맞이한다. 월드컵이 치러진 2002년 26억 원의 소규모 흑자를 내기는 했지만 2000년 323억 원, 2001년 2천306억 원, 2003년 1천373억 원, 2004년 928억 원, 2005년 665억 원의 적자 행진을 계속했다.
위 자료, p.40. 2006년과 2007년에는 각각 1천억 원과 1천393억 원의 흑자를 나타냈다. 얼마나 신문업계 전체가 홍역을 치르고 있는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으로 보이는 지상파방송의 경우도 이미 매출 성장은 끝났고 적자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언론의 기업으로서의 속성과 그 현실에 대해 궁금한 분들에게는 역시 한국언론재단에서 나온 『2008 해외 미디어 경영-미디어 기업의 생존 전략』도 유용할 것이다.
지겨운 숫자 얘기는 이 정도에서 그만두자. 하지만 한 가지만 분명히 기억해 두자. 언론사도 자본을 투입해 만든 기업이며 그 기업은 필사적으로 생존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노력의 방향이다.
자본 권력의 두 형태…‘대주주’와 ‘광고주’
자본 권력은 크게 두 부류다. 언론 기업 내부의 자본 권력은 대주주다. 모든 신문과 민영 방송이 이런 대주주에 의해 ‘지배’된다. 언론사는 또 외부에 있는 광고주라는 자본 권력에도 노출되어 있다. 전적으로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방송을 제외하고는 어느 언론사도 광고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공영인 MBC도 전적으로 광고를 기반으로 운영되며 KBS도 2TV의 재원이 광고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광고주의 영향으로부터 단절된 언론사는 사실상 없다.
광고주는 끊임없이 언론에 영향을 미치려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언론 보도는 광고주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자신은 그런 보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데 말이다. 어차피 자신의 상품이나 기업을 홍보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고 광고를 하는 것인 만큼 광고주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 ‘돈’의 힘을 이용하려 한다. 작게는 특정 기사의 내용을 바꾸거나 기사를 빼는 것에서부터 통째로 해당 언론사의 논조를 바꾸려는 시도까지 한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에 아예 광고를 끊어버린 삼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국적으로는 4대강 사업 반대 여론이 높아도 막상 인근 주민과 해당 자치단체들은 눈앞의 이익을 좇아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 휘둘리면서 광고주들에게만 탈속의 경지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시 필자가 광고주의 영향력 행사를 두둔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다만 언론사도 기업이라는 게 현실이듯 광고주가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힘을 동원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현실이라는 얘기다. 관건은 그런 부당한 영향력 행사를 어떻게 막느냐는 것이다.
삼성은 왜 한겨레․경향에만 광고를 중단했을까?
그런데 삼성의 광고 중단 사태는 우리에게 자본 권력의 작동 기제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필자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삼성은 그 많은 언론사들 가운데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대해서만 광고를 통째로 중단했을까?
물론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재벌에 대한 비판이 다른 언론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도 높았다는 게 출발점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내부 자본 권력, 즉 언론사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대주주가 없다. 더구나 공영방송의 경우처럼 자본 권력이 정치권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어렵다. 이들 두 언론사에서는 삼성이 내부의 자본과 결탁해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뒤집어 보면, 내부의 자본 권력이 다소간의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자신이 생산하는 상품의 품질을 유지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광고주라는 자본 권력의 영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는 언론사 내부의 자본 권력과 광고주라는 외부의 자본 권력이 손잡는 것을 막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자본 권력의 영향 계속 강화돼
필자는 언론사의 기업으로서의 현실을 언급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언론 기업들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모든 언론 기업의 대주주들이 문화 산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대단한 포부를 갖고 언론 기업을 시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런 대주주가 있다 한들 생존의 위기로 내몰리다보면 초심을 유지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더구나 애초에 그런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던 이들이라면 어떨까? 특히 언론 기업을 모기업의 안녕과 원활한 사업을 위한 방패쯤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면 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부와 다른 언론의 정보 왜곡에 맞서 싸웠던 데일리 메일의 노드클리프 사장이나 정부의 압력을 이겨내고 워터게이터 사건을 보도하도록 한 워싱턴 포스트의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처럼 대주주이면서 진정한 언론인이었던 사람이 우리에게도 있는가? 물론 외국에서도 흔한 사례는 아니다. 그러니 그런 사례가 우리 귀에까지 들려왔을 거다. 언론사가 아예 독점 기업 수준으로 성장해 여론을 장악하고 왜곡하는 것은 미국이 우리보다 더한 측면도 있다. 언론에 산업 논리를 더욱 과감하게 관철시키면서 문어발식 인수합병으로 몇 개의 그룹이 언론, 출판, 방송, 영화 등 문화 산업 전체를 장악해가고 있다.
언론 기업의 독점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Bagdikian의 역저인 『The Media Monopoly』를 볼 것. 국내에는 『미디어모노폴리』라는 제목으로 2009년 3월에 출간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정부가 언론에 산업 논리를 강화하면서 언론 분야에서도 점점 자본 권력의 영향이 커지고 있다. 취약한 매체는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강한 매체는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 자본 권력의 속성을 노골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언론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실질화 필요
이런 자본 권력의 언론 장악에 대항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언론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제도적 통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언론 내부의 자본 권력, 즉 대주주는 정치권력이나 외부의 자본 권력과의 제휴를 통해 스스로의 입지를 강화하고 이윤을 확대하려 한다. 정치권력의 비호 속에 탈세나 부정 경쟁 같은 불법, 탈법 행위를 자행한다. 탈세로 사장이 구속까지 되는 상황에서 신문고시 위반은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이런 제도적 통제를 실질화해야 한다. 적어도 ‘시장의 법칙’은 지키도록 해야 한다. 우위를 점한 언론 기업이 이런 식의 위법을 저지르는 것까지 방치한다면 이미 산소호흡기 신세인 언론 생태계는 회복 불가능이다. 방송에는 그런대로 몇 가지 공적 통제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정치적인 외풍 탓에 그 자체의 공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됐지만 심의라는 제도는 잘만 운영되면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방송사 내부 감시를 위한 방송편성규약도 있고, 재허가라는 큰 칼도 있다. 하지만 신문에는 이런 공적 통제 장치가 거의 없다. 자체 심의나 신문윤리위원회 같은 자율 기구의 영향력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경우로 문화일보의 연재소설 ‘강안남자’ 건에서 신문의 자체 심의 기능의 한계를 잘 알 수 있다. 수십 차례의 공개 또는 비공개 경고, 주의 등의 조치를 받았지만 수년에 걸쳐 연재가 계속됐다. 판매 부수를 올리겠다는 결단 앞에 이런 자율 규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질적인 공적 통제 장치를 마련할 것인가? 시민 사회 차원의 대응이 필요한 대목이다. 정치권을 움직이는 것도 결국은 시민 사회니까. 그렇지만 지금 같은 방식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시민 사회의 언론 문제에 대한 접근은 그 자체로 너무 정치적이다. 모든 게 정치라지만 언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까지 정치적이 되면 서로 자신의 입장에 따른 주장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네 편, 내 편’을 갈라 ‘네 편’에 대한 비판만을 확대 재생산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어차피 정치 영역에서 할 일이다. 대신 언론사 내부의 자본 권력을 통제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전반적인 설득력을 확보해서 제도를 마련하는 수준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필자가 언론 운동 진영에 있는 분들은 물론 일반 시청자, 독자들을 만날 때 항상 부탁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하려면 사회적으로 언론에 대한 이해 수준을 높여야 한다. 지금 학교에서는 언론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막상 언론에 대한 교육은 시키지 않는다. 대부분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언론 교육을 받은 사람이 언론인이 되는 미국과 다른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는 초중등 과정은 물론 대학에서도 언론의 기능과 윤리 등에 대한 교육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모두가 언론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학 교육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언론학회 미래위원회가 간행한 『언론학 교육의 길을 묻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9년)를 참조.
언론 기업에 대한 내적 통제…언론인의 책무
다음은 내부 구성원에 의한 통제다. 필자가 당장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언론 기업은 영리 추구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생각해야 하는 기업이다. 언론 기능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배임이다. 그런 행위에 동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도 언론의 기능을 잘 이해하고 있는 내부 구성원들이 언론 기업이 사회적 책무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망각한 채 돈벌이에만 매달리는 것을 방치한다면 스스로 공범이 되는 것이다. 이런 가치를 일상 업무의 세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차원의 활동이 필요하다. 하나는 공정 보도를 위한 조직적인 활동이고 다음은 개개인의 행동 지침으로서의 ‘언론 윤리’ 실천이다. 안타깝게도, 두 방향에서의 활동 모두 아직 멀었다.
이런 내부 구성원에 의한 자본 권력에 대한 통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언론인 사이에 팽배한 자사 이기주의와 체계적 윤리 규범의 미성숙이다. 언론 기업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언론인들끼리 공통의 일을 한다는 최소한의 동료 의식마저 희미해졌다. 회사의 이익 앞에서는 모든 잘못이 용서되는 분위기도 있다. 이런 일이 당장 기업으로서의 생존이 위협받는 곳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른바 잘 나가는 신문이나 지상파방송에서도 버젓이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회사 이익에 대한 맹목적 쏠림의 이면에 자신의 안온한 일상에 대한 소시민적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자본 권력은 끊임없이 구성원에게 위기를 조장하고 일사불란하게 기업의 이익에 봉사할 것을 요구한다. 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기사는 나쁜 기사다. 그런 기사를 부득부득 내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조직 생활에 맞지 않는 철없는 사람이다. 구성원들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이런 논리에 세뇌된다. 기업의 탈세를 비판하던 기자들이 탈세로 구속되는 자기 회사 사장에게는 힘내라고 외친 것도 이런 기재가 작용한 결과다. 결국은 언론 기업의 종사자들이 소시민적인 생활인의 자세 이전에 언론인으로서의 기본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다고 모두 투사가 되자는 건 아니다. 한겨레, 경향신문이 언론기업의 절대 기준이라는 것도 아니다. 해법은 언론인들의 연대에서 찾아야 한다.
언론인의 연대, 윤리교육 강화 서둘러야
필자는 2년 반 가까이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언론 노동자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자사 이기주의의 벽이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권력으로부터의 언론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대하는 언론인도 많았다. 언론노조는 물론이고 기자협회, PD연합회, 기술인협회 등등 많은 현업 언론인 단체들이 사안별로 연대하고 있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 하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멀었다. 이러한 틀을 보다 심화시켜 현실의 문제에 공동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상당 부분 탁상공론에 그치고 있는 언론 윤리 기준을 현실화하는 노력도 언론인 공통의 과제다. 안팎의 자본 권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언론인들이 뭉쳐야 한다. 이런 현업 언론인들의 연대의 틀 위에서 시청자, 독자들과의 접점을 확대해야 한다. 언론인이 언론 소비자들의 이해를 제대로 반영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시청자, 독자들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언론인과 언론 기업을 가려내고 평가해 주는 긍정적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당장 실천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다. 자본 권력에 맞서 언론의 독립성을 조금이라도 지켜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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