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주년 특집, 어쩌면 필요없을지도 모르는82호(2023)/50주년 특집 2023. 12. 29. 14:51
전민규 편집장
1973년, 성심여자대학교에서 첫발을 뗐던 <성심>이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학생 자치라는 이름 아래, 처음으로 잉크를 담았던 선배들의 꿈이 지금은 이루어졌을까요? 어쩌면 짧을 수도 있는 시간 동안 시대는 흘렀고 학교의 이름까지 바뀌었지만, <성심>이라는 간판과 그 역할은 변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합니다. 오래전 선배들이 품었던 꿈들을 <성심>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지배하는 부당한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학생들을 위한 진보적 담론의 토론장을 만들겠다는 일념 아래, <성심>은 오늘도 학생들과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과는 별개로 <성심>이 바라보는 세상과 <성심>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예전 같지만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간을 논의하던 <성심>에게 50주년은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는 이를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작금의 현실은 <성심>에게는 기념이지만, 대학 언론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암흑기이기 때문입니다.
2023년, 대학 언론은 존립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예전처럼 시간을 쓸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막중한 업무량과 학교 차원의 지원 감축은 새로 들어오는 인원의 감소를 야기해 언론들을 마르게 했고, 비민주적인 학교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학생들의 무력감은 대학 언론의 효용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팬데믹 상황까지 겹치며 대학 언론들이 제대로 된 교육과 제도 지원 없이 운영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편집물의 질적 하락을 유발해 대학 언론 자체의 가치마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변화 속에 예전부터 조금씩 언급되던 대학 언론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멀쩡히 연대를 약속했던 타 대학의 언론사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고, 이 와중에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다른 언론사들의 목소리도 대부분 학교의 검열을 넘지 못합니다.
대학 언론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낮아진 오늘날, <성심>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학생들에게 독립 언론 <성심>의 가치는 어떻게 다가올까요? 질문에 답하며 오늘은 평소와는 좀 다르게, 어쩌면 다소 냉소적인 분위기로 <성심>의 지금을 기념하고자 합니다.
<성심>의 오늘
<성심>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가 ‘독립 언론’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지원으로 운영하는 ‘자치 기구’인 성심은 다른 언론과는 다르게 독보적으로 자유로운 편집권을 보장받습니다. 덕분에 대학 언론이 위기를 맞은 현 상황에서도 <성심>은 나름대로 자리는 보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심>이 학생들이 부여한 자유라는 무거운 이름에 제대로 보답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교지 편집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학보사 하시는구나.’입니다. 영자신문사는 영어로 신문을 낸다는 점에서, 교육 방송국은 영상 매체와 라디오를 소통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학보사와 구별되지만 똑같이 글을 쓰는 우리는 학보사와 쉽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매년 3권 정도의 교지를 내고는 있으나 학생들의 관심은 여전히 부진합니다.
혹자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학생들이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클릭 한번으로 정보를 얻기가 간단해진 오늘 날에 굳이 긴 글을 읽으며 생각하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대를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관점이 불편하기는 하나, 이는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분명 사람들은 예전처럼 글을 읽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우리에게 변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성심>이 여태껏 지켜봐온 독자들은 가치 있는 기사라면 시간을 내어 읽고 바쁜 일상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용기 내어 나서는 그런 학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심>이 학보사와 구별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곡에 위치한 작은 학교, 주님의 사랑 아래 조금의 ‘잡음’도 허락되지 않는 오늘날의 평화로운 가톨릭대학교에서 독립 언론 <성심>은 어쩌면 필요 없는 존재인 걸까요?
<성심>의 첫눈
성심 교지 2호 ⓒ성심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던 와중, <성심>은 1973년에 발간했던 <성심> 2호 교지를 발견했습니다. 먼지에 덮인 채 방치된 교지들은 찢어질 가능성 때문에 펴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그 자체로 <성심>에게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이 자료들의 가치는 단순히 오래된 것만이 아닙니다. 진실이 당연하지 않던 언론의 암흑기에 당장의 현실과는 달라야 할 미래를 위해, 숨죽이며 활자를 옮겼을 선배들의 기록은 오늘날의 <성심>이 초심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전체가 한자로 쓰여 읽을 수조차 없는 과거의 자료였지만, 매 페이지 가득 채워진 글자들은 우리의 감회를 새롭게 했습니다.
확실히 오늘날은 그때보다는 낫습니다. 소수에게만 허락되었던 대학 교육은 이제 미래를 위한 선택의 영역이 되었고, 검색 한 번이면 어지간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선배들이 투쟁하며 얻은 언론의 자유는 요즘 들어 흔들린다고 하나, 개념 자체는 너무나 당연해졌습니다. 덕분에 ‘적어도’ 자치 기구인 <성심>만큼은 불의한 일을 겪을 상황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전보다 밝아진 만큼 어둠 속에서 진보의 새싹을 틔우겠다는 우리의 목표는 다소 불명확해졌습니다. ‘자유’라는 명제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2023년, 우리가 ‘자유의 종을 난타하던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하기에는 <성심>의 오늘은 의문스럽기만 합니다.
우리는 왜 존재해야하는 걸까요? 배움의 은혜가 넘치는 니콜스관 구석에서 <성심>은 50주년을 맞아 우리의 가치를 다시 새겨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성심>는 일단 대학 언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명확한 가치는 대중에게 정확한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는 것 일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실을 알리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도 우리는 이를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몇 달 뒤에 나올 교지에 옮겨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교지에 담겼던 사실들은 변하는데, 한번 발간되면 우리는 이를 보완할 수 없습니다. 진실의 전달만을 존재 이유로 한다면 우리는 기사 발간의 간격이 짧은 학보사와 기존언론들보다 나은 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학교의 소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은 어떨까요? 전자보다는 낫지만 이마저도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알기 힘든 학교의 정보를 알리는 일이라면 학교로부터 정보를 직접 받는 학교 산하의 다른 교내 언론들이 더 유용합니다. 새로운 정보를 학교 홈페이지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학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정보를 찾기 위해서 긴 글 읽는 것보다는 전화 한번이 훨씬 편리한 시대입니다.
사회를 비판하는 지식인이 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가장 되고 싶은 <성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심>의 모습이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의 모습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차고 넘칠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비판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지식인이란 사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권한 밖까지 관여하는’ 적극적인 참여자입니다. 지식인이란 이데올로기의 파괴를 추구하지만 결국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중간자의 모순을 받아들이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며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속에서 소외된 민중, 즉 학생들의 ‘옹호자’로써 기능해야합니다.
그러나 <성심>의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현재 <성심>은 팬데믹과 일련의 사건들을 수습하느라 수습위원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과 지원을 해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용기 있는 수습위원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의지하는 방식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힘겹게 대학에 와서도 보다 더 힘들게 경쟁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새내기들에게 ‘지식인’의 중간자라는 애매함에서 오는 고통을 무작정 감수시킬 수는 없습니다. 수습위원의 숫자마저 점점 줄어들어가는 와중에 앞장 서야 할 선배들은 지식인은커녕, ‘지식 전문가’의 모습을 겨우 흉내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첫눈을 맞으며
결국 우리에게는 한 가지만 남습니다. 학생 사회의 대변자로써의 역할입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되는 학생들의 관심사와 의견을 대변하고 학생들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토론장을 만드는 일입니다. 물론 이조차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학 언론이 위기에 처한 만큼 학생 자치도 끔찍한 암흑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2010년 <안민석 의원실>이 <한국대학교육연구소>와 함께 전국 198개 4년제 대학의 학칙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81.8%의 대학이 집회 개최 시 학교 측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으며, 대자보와 현수막은 물론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발행하는 지면 역시 92.4%의 대학에서 학교 측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합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과 무력감 속에 학생 대표자의 공백도 길어지며 학생 자치는 겨우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학생 자치라는 가치는 <성심>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대학은 ‘학생이기에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를 존재시키는 학생들의 권리에 있어 우리는 타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현실에 맞춰 상징이 흔들린다면 가치 또한 현실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상관없이 우리의 존재는 학생 자치의 증거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성심>은 기록합니다.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학생들이 부여한 자격의 무게를 잊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지금까지 해주신 것처럼 다가올 <성심>의 내일을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