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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일부 명사 앞에 붙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난’의 뜻을 더하는 말.벗어나는 것은 새로운 것을 깨달은 이의 특권입니다. 기존의 관습이나 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할 수도 있고, 나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을 벗어던지려 할 수도 있죠. 그래서 인지 ‘탈-’의 논의는 언제나 청년, 청춘, 신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의 탈- 담론은 이전의 그것과 같은가요?
지금 청년 세대를 관통하고 있는 ‘탈조선’ 담론은 이 기가막힌 한국 사회를 탈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물론 현실이 기가 막힌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겠습니다만, 탈-담론의 양상은 달라 보입니다. 이전의 탈-담론이 부당한 제도와 관행을 뜯어고치는 ‘탈피’라면, 지금은 바뀔 각이 안서니 차라리 이곳을 뜨겠다는 ‘탈주’에 가깝습니다.
이외에도 탈정치화, 탈물질화, 탈조직 등 우리의 탈출은 지역성을 넘어 수단과 소유까지 가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무엇에도 속하지 말고, 그 무엇도 믿지 말라, ‘구조 앞의 개인은 무력하라’는 신자유주의의 계획이 들어맞았는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글로벌화가 국가의 경계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개인들의 ‘탈조선’ 전망은 희망차 보입니다. 나에게는 수많은 선택지와 기회가 펼쳐져 있는 듯 보이고, 이곳이 별로면 저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슬쩍 부추기기도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떠나 신대륙을 찾으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누구 찾은 사람 있나요? 떠난 이들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조차 잘 들려오지 않습니다. 탈출의 끝이 정박이 아닌 영원한 표류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청년들이 마음 빈곤을 얻지 않고 배길 수 있나요? 헬조선을 천국으로 만들 묘안은 몰라도 지금 청년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성심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그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무너져가는 학생사회에서 뭔가를 다시 쌓아 올리려는 학생회. 일본 우경화의 기로에서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우에무라 재판단. ‘탈홍콩’ 대신 ‘광복홍콩’을 외치는 홍콩 청년들. 위기의 가족을 새로운 가족으로 탈바꿈하는 개인들. 그리고 새로운 진보정치까지.
니콜스 201호에서 전하는 한마디가 탈출 직전의 당신에게 닿아,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을 한 번 뒤돌아 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책 한 권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장 엄아린